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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Feb 11.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02

지각생의 꿀알바 02

아니나 다를까, 또 늦었다.

뭐, 어제보다는 아주 조금 일찍 도착하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급식을 먹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잔소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책상에 엎드려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말도 붙이지 말고 저리 썩 꺼져달라는 거지. 늦게 온 학생이 어쩜 저렇게 뻔뻔할까 싶겠지만, 이만 해도 오늘은 우수상 감이다. 나는 기운 없이 손사래치는 저놈의 손등을 한 대 찰싹 갈기고 싶었지만, 눼눼, 하고 물러났다. 어디가 아픈가.



점심도 굶더니 5교시 중간에 교무실로 갑툭튀.

집에 보내달란다. 엎드려서 푹 주무시기엔 이만큼 안전하고 저렴한 호텔도 구하기 어려울 텐데. 왜 굳이 집에 가서 주무시려고 하시나. 몰골을 보니 집이 아니라 무덤을 가야할 판국인데. 진짜 어디 아픈가? 그래도 끝까지 모른척 해본다. 늦게 온 주제에 일찍 가시겠다는 수작이렷다. 내가 이래 봬도 이 구역 센캐 언니거든?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내가 원래 그렇게 센캐(센 캐릭터, 성격이 좀 씩씩하면 그렇게 부른다.)는 아니었다. 라고 말해 놓고 나니 어쩌면 억제되어 왔던 본능이 여기에서 꿈틀거렸던 건 아닐까, 조심스러운 반성도 해 본다. 결과적으로는 이 학교 부임 2주만에 아이들 사이에서 공식 '미친캐'가 되었고, 단숨에 양아치님들이 알아모시는 '센캐'가 되었다. 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엄마 전화를 받게 된다. 교무실에 쌤 얼굴을 보러 가지 않으면 교무실에서 엄마 얼굴을 보게 된다. 쌤 앞에서 진술서를 똑바로 쓰지 않으면 엄마가 대신 가문의 내력을 쓰게 된다. 쏼라쏼라.



딱히 싸울 힘도 없어 보인다.

아빠한테 연락을 해달란다. 진짜 아프긴 한 모양인데, 수화기 붙잡으러 손을 뻗는 녀석에게서 술 냄새가 아직도 난다. 술병 나셨구만. 걱정보다는 짜증이 솟구친다. 등짝 스매싱 날리려는데, 토하기 직전이니 냅두라고 성질이다.

"네, 아버님, 학교예요. 정우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조퇴시키면 병원에 갈 수 있을까요? 네, 학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같아선 혼자 집에 가기도 어려워 보이거든요. 아버님, 근무 중이실 텐데. 아이고, 네네. 감사합니다."

왜 내가 감사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여튼 이런 애를 혼자 보낼 수도 없고 난감한데, 데리러 와주신다니 일단 감사하다. 교무실에 아버지가 들락거리는 건 죽기보다 싫단다. 오늘은 내 말 좀 들어달란다. 언젠 내가 네 말 안 들었니? 다 제 맘대로 해놓고선. 꼴 보기 싫어서 서둘러 소맷자락 붙잡고 교문 쪽으로 끌고 나간다.  



교문 앞에 벌써 와 계신다.

"어머, 정우 아버지세요? 담임입니다. 근처에 계셨나봐요."

"아, 네. 선생님. 정우 아빱니다. 우리 정우가 말썽이 많죠?"

"아니에요. 그래도 센스는 있어서요. 병원이든 집이든, 가서 좀 눕혀야할 것 같네요."

"제 아들놈이지만, 이렇게 허약해 터진 놈은 처음 봅니다. 아침에는 깨워놔도 못 나가고 쭉 뻗어 자빠져있고. 밤에는 서로 못 챙기니까. 제가 오늘은 부산에 출장도 있고 해서. 집에라도 데려다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아빠. 그만그만. 나 힘들어요. 집 가요."

"이놈 자식, 학교에 교복도 안 입고 다니냐. 선생님, 얘 좀 때려주세요. 말을 안 들어요."

"아, 네네, 아버님.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일단 데리고 가시죠, 정우 힘든데."

"술 처먹고 아빠더러 대낮부터 오라가라하는 놈이 뭘 잘했다고 아프냐고. 엉? 선생님, 이놈이 엄마 빼곤 다 있거든요. 제가 열심히 벌어요. 이놈 나중에 앞가림하라고. 제가 금융업을 좀 하거든요. 아빠가 아들 하나 있는 것 아까워서 이렇게 뛰어다니는데. 뭘 보고 배운 거야, 이놈 자식."



별 이질감이 없어서 그런가,

아님 애가 아파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정우 아버지의 목에 굵직한 은목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겨드랑이에 낀 납작 가방, 화려하게 흘러내리는 셔츠. 이분의 금융업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이분의 출장이 누군가에게 슬픔이 되지 않길, 순간 나도 모르게 기도하고 있었다.

"아, 네. 아버님. 정우 밝고 해맑아서, 어머니 빈 자리가 잘 보이지도 않아요. 이제 다 컸는 걸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정우, 집 도착하면 약 먹고, 정신 들면 톡 남겨. 살아있는지 어떤지, 알았지? 아버님, 다음에 시간 되시면 또 오셔서 말씀 나누시죠. 안녕히 가세요."



애가 밤 늦도록 술을 먹고 돌아다녀도

단속을 못하는 아버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다 놓아도 뭔가 부족해서 비싼 무언가를 파는 가게에서 꿀알바를 하고 있다는 아이. 뭐 하는 집구석이냐 대체. 오늘 저렇게 아프면 알바는 물 건너 갈 테고, 내일은 좀 멀쩡히 나타나려나. 아픈 애가 혼자 밤을 맞이하겠거니 생각하니 입맛이 쓰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새벽 두 시에 카톡.

쌤, 전데요. 알바 때려쳤어요. 쌤 때매 때려쳤어요. 완전 개꿀이었는데. 아쉽다.

아픈 건 어때? 왜 안 자고 카톡질이냐.

쌤이 정신 들면 톡 하라면서요.

정신 좀 들었니? 그럼 다시 정신 잃고 좀 자라.

쌤, 나 알바 관둬서 이제 개털이에요.

넌 원래 개털이야.

아, 쌤. 나 하룻밤에 100도 벌었어요. 제 지갑 못 봤어요?

돈 없어졌냐? 니 지갑을 왜 여기서 찾아?

그런 명품 다 뭘로 샀겠냐고요. 내꺼 짝퉁 아니거든요.

근데 왜 넌 짝퉁같이 사니? 말 못하는 데서 돈 벌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술 먹고 헛소리 상대가 오늘은 하필 나인 건가?

쌤, 이제 짝퉁 아니거든요.

축하합니다. 어여 자.

쌤. 저 뭐해서 그렇게 벌었는지는 안 궁금하세요?

이젠 안 궁금해. 그만 뒀다며. 원래 안 궁금했어. 앞으로도 안 궁금할 거야. 주무세요, 제발. 안녕.

와, 진짜 쌤 알면 뒤집어진다.

쌤, 쌤, 쌤, 자요?

쌤, 나 진짜 그만 뒀다니까요. 쌤 때매, 네?

(나 때문에 뭘 어쨌다고. 내가 뭘 어쨌냐고.)



그 사이 전화벨이 울린다.

카톡 문자 찍기도 이젠 귀찮으신 모양이다.

"쌤, 김은희씨, 아줌마! 진짜, 아줌마들 진짜 싫어."

(이놈 자식이 어디서 아줌마 타령이야, 확 학생부 끌고 갈까?)

"쌤, 근데 아줌마들이 나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줌마 누구?)

"쌤, 근데 아침에 눈 뜨면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알아요?."

(어쩌라고. 그만 뒀으면 됐잖아.)

"쌤, 근데 또 날 좋아해주고. 그럴 땐 또 좋고. 근데 아침만 되면 눈도 뜨기 싫어요."

(너 알아주고 대접해주는 세상이 거기였니?)

"쌤, 나 사실 아직 아파요."

"그러니까 아프지 바보야. 멍충이."

"쌤, 안 잤어요?"

"안 잤으니까 받았지."

"쌤, 와, 안 자놓고 대답도 안 해주고. 나 내일 학교 안 감."

"오지마, 영원히 깨지 말고 그냥 자라. 나도 진짜 잔다."

"아빠 일하는 거 싫어요."

"난 너 일하는 거 싫어."

"아빠가 벌어다주는 돈 싫어요."

"아빠는 싫어하지 말자."

"그래서 그랬어요."

"그럼 그러시든가."

"싫어요."

"난 잘래."

"싫어요."

"잘 자."

"싫어요."

"낼 봐."

"싫어요."

"쌤."

"쌤. 쌤."

"쌤. 쌤. 나 학교 그만 다니고 싶어요."

"쌤. 낼 학교 안 갈 거에요. 실종 신고 하지 마요."

"난 지금 좀 실종되고 싶다. 잘 자라. 끝."



그러게.

연락이 안 되면 너는 경찰에다 실종 신고하면 되는데, 갈 곳 잃은 네 마음은 어디다 실종 신고해야 하는 거냐. 

에휴, 그냥, 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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