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고것 참, 맛있겠다.
영화 <미나리>를 보고,
<영화, 미나리>
미나리 Minari, 2020
드라마 미국 115분
2021. 03.03 개봉
정이삭 감독
스티븐 연(제이콥), 한예리(모니카), 윤여정(순자) 출연
나는 사회 적응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이건 오랜 습관이라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다. 겉보기엔 적극적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수줍음이 많고 누군가를 요청하는 자리에 손을 들고나갈 땐 씩씩하고 외향적이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서로 눈치 보며 등 떠미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지극히 내향적인 성품이 한몫한다. 갈등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고집부리지 않는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뭐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배려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려는 자기 방어.
그래서 얼핏 보면 통 큰 사람 같다.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고, 나보다는 공동체를 더 사랑하는 사람 같다. 책임감도 있어 보인다. 어지간한 것들은 다 오케이 하기 때문에. 내가 처한 환경 전체를 보고 두루 살피며 내 역할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려 하지 않고, 다 좋고 다 좋으니 이 선은 넘지 마, 하는 내 나름의 방어력. 이게 내가 환경에 적응해온 방식이었다. 사회에, 환경에, 직장에, 심지어 시댁에, 녹아들고 적응하려 하기보다는 내 삶의 가치관과 방식을 지켜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연성이 고작 선 긋기였던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어떤 놀이나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될 감초 같은 친구였다. 어제 본 드라마나 아까 돌려 읽은 만화책의 미처 못다 한 뒷이야기 같은 것들을 감칠 나게 이야기하고, 곧잘 종이 치는 순간 결정적인 대목에서 끊으며 다음 쉬는 시간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이야기꾼이었다. 같은 놀이도 새로운 규칙을 하나 더 추가해서 놀이의 난이도와 긴장감을 더 높이고 심장 쫄깃하게 노는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했다. 하지만 밖에서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따로 깊이 우정을 나누며 내 가장 개인적인 일상의 빗장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내가 직장에 무엇을 기여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고, 어떻게 교류하며 이곳에 뿌리박을 것인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일을 하고, 나는 내 인생을 살겠노라고. 이곳에서 삶의 모든 걸 건 사람처럼 사는 당신들과 나는 좀 다르다고. 나는 여기선 이렇게 직업인으로 살지만 내 인생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서. 이걸로 먹고살긴 하지만 이렇게 목숨 걸 일은 아니라서. 미안한데 나 좀 엮지 말아 줄래? 하는 마음.
이런 방어의 근본에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환멸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죽네사네 붙어있어 봤자, 학년 바뀌고 반이 바뀌면 금세 돌아설 사이, 지금은 서로 최고라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 쫑날 사이. 그렇게 서로 인정해주고 다독이며 파이팅해도 결국은 1년짜리 업무, 돌아서면 이기적으로 더 좋은 부서, 더 좋은 업무를 찾아 피 튀기고 울고불고할 인간들, 이런 생리가 싫었다. 일시적이고 자기 편의적인 관계성에 나를 깊이 끌어들이진 말아달라고. 나는 나대로 내 인생이 있으니. 이런 환멸은 어쩌면 내 실체를 까놓기에 조심스러운 자기기만이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 빗장을 열었을 때 다가올 상처까지 감당할 만큼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였다.
같은 곳에 있어도 구별된 삶.
이게 내가 드러내지 않았던 나의 정체. 그 '구별'이라는 것이 여러 모로 쉬운 말은 아니다. 이건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하는 말이다. 같이 뛰어놀더라도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고독한 연습에 집중하는 소녀, 같이 만화책을 보더라도 혼자만의 영어 공부나 동화 쓰기에 골몰하는 중학생, 같이 야자를 하더라도 혼자만의 음악세계에 빠져 신해철과 같이 실존의 의미를 고민하던 고딩,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더라도 나만의 상담실을 차려 아이들의 아픈 뒷이야기를 듣고 우느라 전체 교사회의에 한걸음 늦게 도착하는 교사, 죄다 이런 식. 다가오더라도 어느 부위에서 벽과 마주쳐야 했던 사람들, 그 벽 안에서 혼자 고결하고 또 혼자 섭섭하고, 혼자 도도하고 또 혼자 의기소침한, 어디 있든 이방인,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그곳이 이방이었던, 내 세계를 기준으로 언제나 새롭고 허망했던 그들의 이방 세계.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은 한인 1세대로 미국 거친 땅에 정착해야 했던 이방인이다.
영화에서는 인종 차별이라든가 뿌리가 달라서 특히 더 고생하는 모습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한인 1세대가 겪은 이민족으로서의 어려움이 없진 않았겠지만, 영화에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선 긋는 제이콥의 태도이다. 10년 간 살아온 캘리포니아를 떠나 외딴 시골에 자리 잡은 것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맥을 찾는 현지인을 무시하면서 아들에게 머리를 써야 한다고 으스대는 것이나, 얼마 되지도 않는 한인 시장을 바라보며 억척스럽게 한국 채소를 심고 키우려는 것이나, 그곳에 동화되지 않고 현지인들을 경계하며 스스로 낯섦을 자처하는 삶.
사실 제이콥이 그은 선은 이방인으로서의 경계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경계 안에 자기만의 영토,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고자 한다. 아내 모니카에게도 가족보다 아이보다 더 중요한 자기만의 꿈을 제안한다. 수컷은 쓸모없으면 폐기된다고. 그 가장의 무게를 자기 꿈으로 옮겨와 가족을 위한 가장의 고군분투인지 자기 꿈을 위한 억지인지 알 수 없는 혼돈 속을 걸어간다. 작은 정원을 꾸미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시작하는 건 농장이었고, 모든 걸 다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가족을 포기하고라도 꿈에 대해 더 집착했다.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가뭄에 농작물이 타들어갔고 혼자 만든 물길은 말라붙었으며 집안 수돗물을 끌어다 써버리는 바람에 집에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근처에 사람이 없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심장병이 있는 어린 아들을 돌볼 베이비 시터도 필요 없을 거라고 했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아내가 모셔온 장모님도 그렇게 따뜻하게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저 혼자만의 밭에서 혼자 억척스럽게 노력했다.
하지만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 꿈이었다. 자기가 고용해서 오히려 더 도움을 받고 있는 미국인 농부마저도 진심으로 대하기보다는 적당한 선을 긋고 필요한 대화만 나누었다. 교회도 아내에게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나갔고, 심지어 거래하기로 했던 곳에서의 약속이 무산되면서 같은 한국인이지만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며 분노의 거품을 물었다. 그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고 어디에서나 이방인이었으며 사방에 벽을 치고 오직 자수성가할 것만을 기대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이상적인 꿈을 꾸면서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현실과 맞서야만 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꿈이 투쟁이 되어버린 삶의 현장에서의 고독한 선 긋기.
이 이야기에서 단순히 가족의 끈끈함이나 회복만을 읽기엔 뭔가 찜찜하다.
이곳에 날아온 아이들의 할머니는 우리가 상상하는 할머니와는 좀 다르다. 쿠키를 구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는다. 그저 뱀이 나타난다고 더 들어가선 안 되는 늪지대에 산책을 나가 아무도 관심 없는 미나리 씨를 뿌린다. 아이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킥복싱에 열을 올리느라 아이 옷을 챙겨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부자리에 오줌 싼 걸 놀린 대가로 아이 오줌 맛을 보고도 재미있었다고 웃어주고,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두려워하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었다. 타국에서 고생할 딸을 위해 고춧가루며 멸치며 아이를 위한 탕약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고 알토란 같이 모았을 돈봉투까지. 억척스러운 딸내외의 타국살이에 스스럼없이 선을 허물고 들어온 할머니. 선을 넘나든다는 것은 질서의 파괴가 아니라 어쩌면 소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든 소통이 삶의 원천이 된다.
물기 가득한 늪지대가 미나리로 뒤덮였다.
섬세하지는 않지만 투박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한 할머니의 마음처럼. 그녀의 말마따나 원더풀, 원더풀이다. 일 년 농사를 말아먹은 뇌졸중 할머니가 또 다른 희망을 키워두었다. 어디에나 잘 자라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미나리를. 그러니 더 이상 이방인 같이 선 긋지 말라고. 혼자 뚝심으로 밀어붙이려고 하지 말라고.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서로 마음을 나누며 같이 꿈을 꾸자고. 그 미나리를 보며 제이콥은 맛있겠다고 한다. 함께 하는 꿈은 참 맛있다.
늘 복면에 감춘 나만의 세상이 어느 날 무너졌다.
내 쌩얼이 신의 얼굴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만의 세상보다는 함께하는 세상이 더 나를 나답게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부터. 그래서 빗장을 풀었다. 나는 나대로, 당신들은 당신들대로, 각자의 평행선에서 내 나름의 보호색을 뒤집어쓰고 갈등 없는 편리한 삶의 도도하고 고독한 궤도에서 내려왔다. 그래서 자꾸 갈등이 생긴다. 내 쌩얼을 본 사람들과 그들의 쌩얼을 벗기려는 나 사이에 벌어지는 거리 다툼, 그 틈바구니에 내 자리를 밀어넣어려는 간격 다툼. 그래도 같이 간다. 닮아 간다. 혼자 꾸는 꿈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꿈이 아니라, 나도 당신도 성장하는 꿈, 각자 하고 싶었던 것들을 같이 하는 꿈.
어쩌면 지금이 나에겐 가뭄 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치료법이 없는 병으로 아프다. 5인 집합 금지로 자잘하던 소통도 그저 꿀꺽 삼키고 마는 시대. 영끌로 집을 산다카더라 할 때 내 영혼을 끌어모아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회는 없다. 다만 이런저런 타이밍이 딱 멈춰버린 수돗물 같다. 나도 미나리밭에서 물을 길어와야 할 때도 있다. 물길을 찾기 위해 내가 선 그었던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위험해서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축축한 곳, 인생 곡선의 가장 바닥에서, 누군가 뿌려둔 이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가 지천에 풍성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게 내 인생의 반전.
미나리, 고것 참, 맛있겠다.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는 원더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