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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May 18. 2019

와인의 색(色)

내 어린 시절 지하철의 색상은 부산에 살았기 때문에 1호선 오렌지색 하나만 있었다. 친척집을 올라와서 그 많은 지하철역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에는 1호선 빨간색, 2호선 녹색, 3호선, 오렌지색, 4호선 하늘색이었고 시간이 지나서 남색으로 변했다. 요즘 수도권 전철 노선을 한 번 본 적이 있는가? 무지개 색상에 덧붙여 금색까지 있다. 가히 수도권은 지하철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GTX가 들어선다면 역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일단 노선부터 외우기가 어렵다. 1~9호선. 인천1,2호선, 분당, 신분당, 경의중앙, 경춘, 공항, 의정부, 수인, 에버라인, 자기부상, 경강, 우이신설, 서해선까지 숨차서 다 읽기도 힘들다. 색상은 녹색톤을 내는 것이 2호선, 경의중앙, 경춘, 에버라인, 서해선인데, 경의중앙선과 용인 에버라인은 색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색 이야기를 처음에 늘어놓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로는 우리가 색의 공해에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며, 두 번째로는 와인의 색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것이다. 외국에 있다가 한국을 들어오면 색의 다양성과 함께 일관되지 않음에 놀라게 된다. 산토리니섬의 전경은 파란 바다와 흰 벽, 새파란 지붕으로 각인된다. 이에 반해 우리의 주변은 지하철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색을 잘 선정하면 어떤 개체의 특징을 각인시켜주는 좋은 방법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두 번째, 이 글에서 이야기 하고싶은 와인의 색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얼마 전 헝가리 푸르민트(Furmint) 품종의 젊은 빈티지 와인을 시음해볼 일이 있었다. 드라이했는데, 라벨의 색상이 창백한 하늘색이거나 창백한 노란 색이었다. 와인을 잔에 따라보니 이보다 더 밝은 색은 찾기 어려운 정도다. 가벼운 리슬링의 색상도 이보다는 더 노랄 정도로 색상은 창백했다. 창백한 노란 빛에 투명에 가까운 빛은 말 그대로 “하늘의 파란”색이라 표현하는게 나을 정도였다. 맛 역시 가볍고 신선했는데 은은한 당도가 있었다. 반대급부로 “이 포도를 얼마나 응집해야 우리가 생각하는 토카이(Tokaji)가 나오게 될까”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다음 사진만 봐도 푸민트가 얼마나 투명한 색인지 알게 된다.)


창백한 색상의 와인에서부터 출발하여 부르고뉴나 보르도의 올드 빈티지로 오게 되면 색상에서 많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점차 옅어지는데 선명함에도 조금씩 차이점이 나타난다. 필터링을 하지 않은 와인은 잔 속에서 빛이 산란되어 반대편이 약하게 뿌연 느낌을 준다. 침전물이 비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서빙 전에는 2~3일 안정화도 필요하다. 미세 침전물은 빛을 산란시켜 명징함을 떨어뜨린다. 특히 마지막 잔으로 갈수록 빛의 산란은 미세 침전물 때문에 더욱 산란된다. 요즘 많이 각광받는 내추럴 와인은 이 투영이 제법 산란된다. 필터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잔 반대편으로 비추어서 흰 종이에 투영되는 색상의 느낌은 와인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또한 투명도에 따라서 와인의 변질 여부도 쉽게 알 수 있다. 탁한 색상이 돌거나 첫 잔부터 침전물이 보이면 변질 확률이 매우 높으니 반품해야 한다. 기술정보(Technical Sheet)를 보아서 필터링을 했다고 하는데 잔의 색상이 명징하지 않으면 품질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다만 오렌지 와인이나 내추럴 와인은 필터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맑은 느낌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와인을 감별할 때에 어느 정도의 기본 정보는 제공해주어야 상한 와인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다.


레드 와인의 경우에도 색상이 주는 정보는 명확하다. 특히 프랑스 남서지역의 주력 품종인 타냐(Tannat)의 경우에는 그 잉크같은 색상으로 유명하다. 잔 반대쪽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강인한데 이 경우에도 스마트폰의 조명을 비추어보면 비교적 색상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이 진한 색상이 시간이 갈수록 점차로 아름다운 갈색 림을 만들어주는데 대표적으로는 몽투스(Montus)의 XL은 올빈이 될수록 색상이 천천히 옅어지나, 잔 주변의 림은 아름다운 황금테를 두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어린 와인의 경우 따를 때 나타나는 거품의 색상을 보는 것이 좋다. 잔에 따를 때 거품에 보랏빛이 돈다면 아마도 어린 와인이라 판단하는 것이 좋다. 데일리로 마시는 시라(쉬라즈) 계열의 품종 와인들은 이러한 특성이 많이 나타난다. 카베르네 소비뇽 계열은 붉은 장미꽃 계열의 색상이 많이 비친다면 어린 경우가 많다. 물론 보라-자주-갈색 순으로 숙성이 되어가며 나타나는 와인의 에이징은 여전히 유효한 색상 감별법이다.


(타냐의 색상, 딥퍼플이라 하는데 딱 맞는 표현이다.)


와인 평가에 있어서 색상의 비중은 약 10%로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와인의 색은 사전에 많은 정보를 알려주기 때문에 시음하기 전에 마음가짐을 많이 바꾸어준다. 또한 색상을 잘 알아보면 굳이 와인 마시는 자리에서 입을 후루룩 하는 추태를 보이지 않아도 우아하게 와인의 느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와인의 색을 감별하려면 많은 와인을 접해야 한다. 마치 경의중앙선, 경춘선, 용인에버라인 색상을 구분하듯이 와인도 색을 많이 접해야 한다. 아직까지 인간의 인쇄매체나 모니터의 색 재현율이 절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색을 나타내지는 못하기에 와인의 그 미묘한 색 차이점은 반드시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 색을 이해한다면 와인을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가 늘어날 것이다. 오늘부터 와인 마시기 전에 색(色)에 차근차근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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