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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May 18. 2019

1만 와인 시음 이후

무위(無爲)에 대해 생각하다

얼마전 포스팅으로 0.1% 시음을 하면서 1만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크다면 큰 것이고 작다면 작은 것이다. 잠시간 중간 기점이라 생각하여 글을 하나 남겨본다.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로 “무위(無爲)”라는 것이 있다. 이를 해석하면 “위함이 없이 위하다”라는 뜻인데 참 알쏭달쏭하다. 무엇인가 하니, 누군가를 도와주었으면 누군가를 도와준 것을 잊고, 지금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주었던 것은 과거이니 잊으라는 말이다. 다만 남이 나를 도와주었던 것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미 받았던 도움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으니 언젠가 꼭 깊으리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도움받은 것은 기억하고 도와준 것은 잊으라 하니 참 억울하다. 계속 퍼주기만 하다가 바보 소리만 들을 수도 있고,


세상에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다. “내덕분에 이렇게 된 것 고맙게 생각하셔야 해요.”라고 말이다. 사실 댓가 없는 일은 없다. 합당한 도움을 주었다면 상대편은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면 그만이다. 만약 상대편이 무위로 나를 도와주었다면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되지만, 만약 상대편이 나에게 그 고마움을 꼭 기억하라 한다면? 상대편은 무위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도와주었다는 과거에 얽매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와인을 마실 때 늘 고마움을 받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까지 1만 개의 와인을 테이스팅 하면서 내 돈만으로 마셨다면 이 와인들을 제대로 다 시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눠 마신 와인들도 있겠지만 많은 와인들은 수입사들이나 외국에서 귀한 와인을 가지고 온 분들, 그리고 해외에서 한국까지 날아와서 와인을 소개해준 수많은 포도원들, 외국에 방문했을 때 나를 위해 와인을 기꺼이 열어준 그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요즘도 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바깥에 하나라도 더 도움이 될 것을 찾아다닌다. 내가 억만장자라면 필요한 곳에 돈을 아낌없이 내어 쓰는 것이겠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다 보니 다른 방법으로 도울 궁리를 많이 한다. 사람을 소개해주거나, 조언을 해주거나, 환경에 대한 분석을 해주거나 하는 것이다. 와인 시장 보고서도 주변의 도움에 대한 일종의 보답인 셈이다. 어떤 이는 실지로 도와주어서 그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나 어떤 이는 그저 받기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다른 사람을 마음 내어 도울 일이 있으니 자연의 이치에는 맞는 것이리라.


불가에서는 셀 수 없이 큰 숫자를 무량대수라 한다. 사실 숫자를 세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래에 대한 집착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에 의미를 애써 부여하는 것도 내 마음의 크기가 이 정도만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살아서 몇 가지의 와인을 마셔볼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의 무량대수면 그것 자체로 충분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나를 도와준 많은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다만 나 자신도 항상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남에게 “나의 감사함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바라는 것이 없는지 말이다. 물론 회사에 다니고 급여를 받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비즈니스 관계나 어떤 이익이 상호간에 발생했다면 정당한 대가는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의 도움에 대해서, 내가 이룩한 것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내가 아닌 주변의 사람들이나 사회, 혹은 역사가 될 것이다. 내가 이룩한 것을 내가 평가한다는 것은 ‘자만’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가 이룩한 것을 스스로 평가할 때 나의 업적이라는 것을 밖으로 강요하게 되는 행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들기 때문에 언제나 스스로를 살피고 다잡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1만 와인 시음을 한 뒤 감사하는 행사로 모두를 초대했다. 다만 주머니가 가벼워 다시 수입사들에 다시 신세를 지고 말았다. 행사를 열었던 레스토랑에도 비용을 넉넉하게 드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초대하지도 못했고 공개행사로 하지도 못했다. 주변에 미안할 따름이다. 나를 도와준 이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데 대접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이 감사함을 어떻게 갚을지 고민한다. 와인을 잘 홍보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매출에 나타나지 않으면 도와주는 것이 아닐지니, 주변에 틈만 나면 와인을 소개하고 다녀야 할 것 같다. 그렇더라도 그 감사함을 다 갚을 것인지 알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받을 많은 도움은 잊지 않고, 그 기록을 잘 남겨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다시금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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