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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Apr 04. 2020

당신 마음속의 시음 적기는 언제인가요?

(이 칼럼은 경어체로 기록합니다. 그게 더 느낌일 날 것 같아서입니다.)

고급와인을 즐기는 당신이라면 아마도 와인의 시음적기에 대해서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음적기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와인의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올려보려는 사람부터, 크게 관여는 하지 않으나 제대로 시음적기인 와인을 만났을 때 크게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시음적기는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와인은 생산되고 1~2년부터 시작해서 몇 년 정도만 가장 맛있는 맛을 만들어 냅니다. 가격을 떠나 저의 경험으로 대부분의 와인은 시음 적기가 이른 편입니다. 그리고 그 시음 적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3만원 이하 와인들은 시장에서 소비자군을 와인 입문자 혹은 와인을 즐겨 마시지만 굳이 와인의 지식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소비자로 잡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시는 방법이 까다로우면 안되겠지요. 까자마자 바로 맛이 나야 합니다.


그러나 간혹 의외의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밤에 제안서 작업을 하면서 와인을 즐기는 편입니다. 얼마 전 웬티의 서던 힐즈 카베르네 소비뇽을 한 병 열었지요. 작년에 제가 올해의 레드와인으로 뽑은 와인입니다. 그런데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이번에 긴급 공수되어 들어온 물량이라는데 너무 풋풋한 느낌이 들더군요. 한 잔만 마시고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업무로 급한 불을 끈 뒤, 3일 뒤에 냉장고에 넣어둔 와인이 생각나 다시 한 잔 했습니다. 놀랍도록 깨어나 있더군요.


이처럼 와인은 의외의 느낌을 보여주는 때가 있습니다. 냉장고에 몇 일 넣어두면 공기 접촉이 된 상태에서 더 맛있어지는 경우 말이지요. 그렇지만 모든 와인 소비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와인을 소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은 와인을 한 병 열어서 디켄팅에 넣은 다음 천천히 그 변해가는 모습을 즐기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초고가의 와인을 한 병 산 뒤, 수 십년 셀러에 보관하여 최적의 시음적기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시음 적기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와인의 시음적기는 와인이 정하는게 아니고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인위적이고 주관적이죠.


얼마 전 길을 걷다가 목련, 개나리, 매화, 벚꽃이 핀 것을 보았습니다. 개나리는 다 떨어져가면서 녹색잎이 더 많아지고 있었으며, 매화는 만개 했고, 목련은 반 정도, 벚꽃은 이제 겨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바라보기를 ‘난 목련의 떨어지는 잎은 너무나 슬퍼 보여서 피어나기 전의 꽃망울일 때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꽃이 언제 가장 아름다운지에 대한 개인별 호불호는 다르겠지요. 저는 가지에 매달려서 온전하게 건강한 벚꽃을 가장 선호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서서히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벚꽃잎을 가장 사랑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시음적기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주관이 만든 기준이기에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라는 점이지요.


앞의 웬티에 대입시켜본다면 오늘 깠을 때는 꽃망울이 터지기 전이지만 나름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몇 일 뒤 꽃이 만개하니 의자에 앉아 하늘을 멍하니 보며, 파란 빛깔과 수줍은 분홍 빛을 살짝 머금은 벚꽃의 색이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웬티의 모습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꽃을 보면서 나는 와인에서 받는 느낌이 같은 맥락에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고급 와인은 어떨까요? 보르도의 2015 그랑크뤼 등은 더욱 어렵겠지요. 고급 와인의 시음적기는 난초의 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피어날지 모르지요. 얼마 전 지인 사무실 난초의 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에게 물었더니 몇 년간 피지 않다가 올해 피어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한 번 죽은줄 알았는데 뿌리를 정성껏 보살펴 주니 다시 피어났고, 올해는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고급 와인은 휴지기를 갖습니다. 죽은 듯이 있어서 마치 1~2만원짜리 와인보다 더 맛없을 때가 있습니다. 와인은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지도 모릅니다. 난초의 꽃도 우리가 기다리며 또 기다립니다. 다만 언제 피어날지 모를 뿐이죠. 고급 와인의 시음적기는 글로 쓰여진 몇 년부터 몇 년이라는 서양의 관념 보다는 마치 우리가 난초의 꽃을 기다리듯,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느 좋은 날 열어주면 그 시점에 가장 화사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시기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 것을 기다리는 것은 사람이고, 꽃은 그런 사람의 마음은 모릅니다. 와인도 그렇지 않을까요? 인간이 시음적기의 잣대를 놓아둔다 하더라도 와인은 알아서 변화해갈 것이며, 그 마지막에 만나는 것이 사람이니 말이지요. 그 때 어느 맛이 당신의 입에 가장 맞을지(예를 들어 산도, 당도, 밸런스, 피니시 등등)는 모두 다 여러분들의 몫일 듯 합니다.


저는 오늘 18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강건한 한 론 와인을 마셔볼 생각입니다. 가장 극악했던 자연환경을 견뎌낸, 이 와인이 오늘은 어떤 맛을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이미 얼마 전 칼럼으로 한 번 소개한 적은 있느니 와인에 대한 설명은 제외하겠습니다. 혹자는 정점을 찍었고 산도가 높다고 하겠지만, 제게는 떨어지는 벚꽃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시절은 수상하지만 봄날은 계속 갑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와인도 이렇겠지요. 오늘 저녁 마음가는 와인 하나 열어서 봄꽃의 어느시점이 내가 마시는 와인과 엇비슷한지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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