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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Oct 10. 2022

원래는 청포도였다

우리가 마시는 와인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스파클링, 화이트, 레드, 로제, 디저트, 오렌지, 시작하는) 시점의 포도들을 보면 청포도와 적주정강화 등등 그 종류를 다 열거하려면 입이 아프다. 그런데 포도의 베레종(포도가 영글기 시작하는 시점)을 보면 레드 품종에도 녹색의 포도들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색상이 햇빛을 머금어 서서히 붉어진다. 다만 여전히 포도의 과육은 희다. 껍질의 색상만 다를 뿐 과육의 본질은 여전히 흰 것이다. 껍질의 색소가 계속 들어와서 속까지 붉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출발점은 그 속이 흰 것에서 보아야 한다. 본질은 모두 화이트 와인인 셈이다.


품종에 따라서는 이 색상이 변하는 포도 품종도 있다. 말바시아(Malvasia)나 뮈스카(Muscat) 계열의 포도는 테루아나 지역, 그리고 세부적인 품종에 따라서 레드로 분류되기도, 화이트로 분류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간혹 말바시아 품종에 레드나 로제를 보고는 레드 품종으로 아는 때도 있으나, 이 포도는 근원적으로 화이트 품종이다. 뮈스카 역시 화이트와 레드가 모두 존재한다. 뮈스카는 그 아래 200개가 넘는 하위 범주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포도 품종이라 보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뮈스카는 화이트 품종인가 레드 품종인가? 이런 여러 관점을 살펴본다면 포도 품종에 있어서 레드 화이트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레드 와인은 속은 흰, 아니면 거의 흰 포도에 붉은 껍질의 색소가 덧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껍질의 성질로 인해 내부의 특성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화이트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피노 누아르의 경우에는 부드럽게 압착하여 나온 와인으로 샴페인을 만드는 경우 색상은 희나 분류는 블랑 드 누아르(Blanc de Noir)로 하듯이, 우리 주변에는 이 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와인들이 많다. 최근에는 화이트 메를로, 화이트 카베르네 소비뇽과 같이 레드 품종의 즙만 짜서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모든 것은 푸르름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색깔을 갖추어 나아간다. 레드 와인도 원래는 그 출발점이 푸른 포도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와인을 과도하게 구분할 이유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의 양조 스타일과 방법에 따라서 자연스레 어떤 하나의 와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화이트 와인의 경우에도 매우 오랫동안 가지에서 완벽하게 익을 때 까지 기다리는 경우에는 훨씬 노란 빛을 띠게 된다. 그리고 처음 짜낸 포도즙은 탁하며, 오히려 푸른 기운이 돈다. 그 색상에 사람의 손길과 발효, 필터링을 거쳐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일반적인 와인이 되어간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의 본질은 같지만, 그것이 사용되어가고 상호작용 되어가는 과정에서 변한다고. 사람도 태어나면서 뼛속까지 악인은 없을 것이다. 출발은 새하얀 백지, 화이트였을 것이다. 다만 살아가면서 상호작용과 환경에 따라서 점차 변한 것일 터이다. 그렇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숙성된 와인이 다시 처음의 청포도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매 순간순간을 집중하여 관리한 포도만이 최고의 와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매 순간순간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는 이가 마지막에 웃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그러나 과정은 “순간순간의 결과”가 합쳐진 것임을 생각하면 어느 한순간도 쉽게 보낼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집중하고 매 순간 좋은 결과를 만들고자 노력한다면 각자의 인생에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마치 화이트와 레드, 스파클링, 포트, 내추럴에 각각 최고의 와인들이 존재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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