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써보고싶던 주제였다. 왜 한국시장에서 로제 와인은 백전 백패인가 하는 점이다. 얼마전 유럽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가서 몇몇 생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략적으로 모두 로제 와인을 생산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며 샘플도 생산했다. 특히 레드 와인만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지역에서는 로제에 대한 관심도가 꽤 높았는데 이는 레드 품종으로 로제를 쉽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디감 있는 로제를 만들어서 레드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입맛도 사로잡겠다는 복안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서 로제 와인이 국내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거나 히트 했다는 경우를 들어본 적은 없다.(만약 있다면 내게 알려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수많은 지역, 그리고 수입사들도 로제 와인을 국내 시장에 소개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다. 이유는 꽤 간단한데 유럽의 경우에는 화이트 와인 소비보다 로제 와인 소비가 더 많은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로제 와인의 시장 수요가 많은 것을 외국에서 본 수입사들은 당연히 한국 시장에서도 로제 와인이 새로운 시장 개척의 첨병이 될 것을 생각하고 수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수입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수입을 자제했으면 하는 것이 로제 와인이다.
물론 로제 와인의 품질은 대단하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중간자적 역할을 하면서 레드 와인을 부담스러워하는 소비층에도 쉽게 어필할 수 있다. 화이트 와인이 밋밋하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에게는 좀 더 묵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질감을 선사함으로써 화이트의 부족함을 메꾸어줄 대체제가 된다. 해산물이나 여러 식전 요리에도 로제는 훌륭한 매칭을 보여준다.
첫째, 시장에서 유통되기 좋은 기간의 문제다. 가장 큰 문제인데, 고급 로제 와인의 경우에는 시간이 오래 흘러도 색상이 잘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 타벨(Tavel) 지역의 고급 로제 와인의 경우 레드 와인에 필적하는 보디감과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는 멋진 색상을 자랑한다. 문제는 이 경우에 가격이다. 레드와 경쟁해야 하는 가격 수준으로 오르는데, 이 경우에 소비자들은 레드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격이 저렴한 로제 와인의 경우에 곧바로 마시기에는 좋은데 이 경우 색상이 2~3년 지나면 변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에서는 로제 와인이 빠르게 소비되기 때문에 색상 걱정을 할 이유가 없다. 당연히 생산 과정에서도 적당히 아름다운 색상이 나온다면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는 사정이 다르다. 수입 과정에서 이미 아주 맛있는 시기를 넘기는 경우가 많으며, 시장에 제대로 소개되려면 생산 이후 1년 이상 지나야 한다. 이미 색상이 약간씩 변하는 경우가 많으며 맛 자체도 상큼함 보다는 뭉근함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2~3년 지나면 색상이 약간씩 변하는데 특히 햇빛에 노출되거나 여러 환경에 노출될 경우 화이트보다 변화가 더 심하다. 로제 와인은 남성 소비자보다 주로 감각을 중시하는 여성 소비자들에 어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선택지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둘째, 국내 소비자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맛 스펙트럼에 있다. 로제 와인은 맛을 보면 해산물에 적용하기도 적절하고 한식에도 적용하기 적절하며 고기 요리도 어느 정도 맞다. 산도가 많이 강한 편도 아니며 적절하고 둥그스름한 보디감, 약간의 단 느낌도 경우에 따라 있어 편안하게 마시기에 좋다. 그런데 로제 와인은 포도원별 편차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좋아하는 자극적인 요리에 보조자 역할을 할 뿐, 음식에 임팩트를 주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한국 요리는 상대적으로 맛이 강하기 때문에 로제 와인의 스타일이 매운 맛을 일부 중화해주기는 하나, 크지 않다. 오히려 매운 음식 등에는 다른 주종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고기 요리에는 레드 와인이 더 강점이 있고 회나 일식 종류에는 기라성 같은 화이트가 많다. 당연히 로제는 제2의 선택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셋째, 명확한 고급이 없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모두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명징한 고급 와인이 존재한다. 수 백 만원에서 수 천 만원에 이르는 고가 와인들이 즐비하며 사람들은 해당 종류에서 이 와인들의 맛을 점차 따라잡으려 포도원의 이름이나 테루아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로제 와인에는 이만한 고가가 없다. 프랑스 방돌(Bandol) 지역에 일부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 가격이 엄청나게 높지는 않다. 소비자들이 와인을 탐구하는 이유중 하나는 좀 더 고급이 존재할 것이라는 발견의 즐거움도 있기 마련인데 로제는 그런 즐거움에서 약간 거리가 있다.
로제 와인의 품질은 누가 뭐라 하든 내 기준에서 정말로 뛰어나며 가성비도 좋다. 그러나 국내 시장의 특징과 소비자의 성향에 있어서 로제가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소비자들의 성향, 그리고 여성 소비자들의 로제 선택 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상 로제가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기에는 약간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소비자의 취향은 언제나 변한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로제 와인이 국내에서 급격히 각광받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국내 시장 동향으로 본다면 로제는 여전히 어려운 영역이다. 개인적으로는 바라건대 로제 와인이 국내에서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다음 제4의 와인 종류로 분류되어 통계에 반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