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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Oct 16. 2017

사람이 변하는가 와인이 변하는가

사람이 좀 더 빨리 변하는 것 아닐까

(와인이십일닷컴 칼럼 중 종종 매거진으로 공유합니다.)




와인이라는 것은 참 요물이다. 화이트 와인이라 하더라도 컨디션이 좋지 못하면 그렇게 알코올이 느껴질 수 없다. 아무리 멋진 피노 누아르라도 기분이 우울한 경우에 마시는 피노 한 잔은 과실의 풍성함보다는 진득하고 묽은 보이차 같은 느낌에 달달한 보디감만 날 때도 있다. 와인이 변한 것인가 사람이 변한 것인가? 어떤 경우는 와인이 날 위로하는 것 같다. 기분이 우울할 때 처음의 그 진득한 맛이 한 시간 지나고 두 시간 지나니 어느새 전혀 새로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 놀랍도록 피어오른다. 정말로 와인이 온도에 따라서 아로마의 비산 되는 범위가 커져 피어난 것인가, 아니면 역치로 내 코가 아로마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여 그 사이에 민감도가 높아진 것인가? 와인이 깨어나 변한 것인가, 내가 각성한 것인가? 알 길이 없다.


최근의 내 생각은 물질의 변화보다는 사람의 변화가 더 급격하다는 것이다. 와인의 온도를 차게 한 뒤에 그 상태를 바라보건대 서서히 피어나는 아로마에 따라서 나의 마음 상태, 그리고 코의 반응이 바뀌어서 와인에 대한 반응이 바뀐다. 노련한 소믈리에나 와인 전문가라면 처음의 상태를 테이스팅 해 보고는 그 뒤의 맛을 유추할 수 있다. 와인이 변한다기보다는 와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로마가 퍼진 것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을 좀 더 많이 확인한 결과로 보는 것도 맞을 듯하다. 아직까지 디캔팅에 의해서 와인의 아로마나 화학구조가 변하고 그에 따른 맛의 변화가 강해진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적어도 내 지식에는) 다만 산소에 오래 노출되면 산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 산화의 과정에서 와인의 맛이 변했다면 변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 속에 든 와인이라는 것은 사람보다는 천천히 변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의 마음은 훨씬 조변석개 같다. 그래서 요즘은 와인이 변하는가 사람이 변하는가 할 때 사람이 변한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페이스북 기능을 보면 간혹 1년 전, 3년 전, 5년 전 등등해서 사진이 올라온다. 감사한 기능이다. 구글 포토에도 내 기억에 없는 수많은 사진을 친절하게 정리해서 올려준다. 그 사진을 보면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가 세어보니 손에 꼽는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알음알음 물어보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모임을 잘 만들어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만약 사진을 뒤지다가 내 모습을 본다면 무엇이라 할까? 아마 나와 생각은 비슷할 것이다.


급격히 가까워지기도 하고, 어쩌다가 천천히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서먹해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 사는 관계 같다. 그리고 그 서로 섞이고 부딪히는 과정의 시간이 한편으로는 참으로 빠르기도 하고, 어느 면으로는 더딘 것 같기도 하다. 살펴보니 1년 전에 내가 같이 마시던 사람이 지금 같이 마시는 비중과 2년 전, 3년 전의 비중을 비교해 보면, 3년 이상 같이 와인을 마시는 사람, 10년 이상 같이 마시는 사람의 비중은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와인을 구매하면 10년 이상 숙성시키기가 참 어려운 것처럼 사람 관계도 늘 가까운 모임을 가지며 10년 이상 가는 것은 사람들 마다 하나 혹은 둘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득 오랜 지인들에게 와인 마시자고 연락해서 자리를 짜 볼까 생각도 해보는데 쉽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담백하게 네댓 명 만나는 그런 자리가 이제는 더 좋다. 덕분에 이제는 오래 알음알음 만나는 그런 모임이 늘어나는 것 같다. 와인에 대한 관심과 정리는 늘어나지만, 그 와인에 매몰되지 않는 마음이 늘어나니 오히려 와인이 더 즐거워지고 평화롭다. 과거 같으면 유명한 와인을 마시는 페이스북 이웃들의 사진이 부러울 법 하나, 지금은 전혀 부럽지 않다. 과거처럼 와인이 빨리 깨어나도록 만들기 위해 조바심을 부리는 것만큼 인맥이 자주 바뀌었다면, 이제는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이 없으니 인맥에 대한 미련도 없는 것 같다. 덕분에 더 편안해졌는데 거꾸로 인맥은 더 늘어나는 느낌이다. 진솔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요즘 와인 한 잔 한 잔에 집중한다.


두둥실 하늘에 와인 떠간다. 저 와인 마실 수 있는 내 건강이 든든하고, 이 와인 하나 꺼내어 마실 벗 있다면 그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선선해지는 지금 날씨, 가벼운 와인 하나 빼어 들고 와인보다는 빨리 변하는 나 스스로를 위로함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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