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휘웅 Mar 15. 2018

섬세한 맛으로의 흐름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유행이라는 것이 정말로 빨리 바뀜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아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경규가 나와서 자신의 레시피를 제시하고,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쳤던 꼬꼬면, 그리고 나가사끼 짬뽕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흰 국물이 라면 시장을 휩쓸었으나, 지금 흰 국물 라면은 시장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1~2년 전에는 짬뽕의 시대, 그리고 프리미엄 짜장의 시대에 이르렀다. 이 프리미엄 짜장 역시 지금 시장의 주도권을 쥔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했던 사례로 허니버터 유행을 들 수 있다. 한 때 없어서 사 먹지 못할 정도로 시장에서 큰 호응을 받은 허니버터는 지금 어디에서 팔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음식에도 이렇게 바뀌는 유행이 있다. 반짝 떴다가 반짝 사라지는 유행이 있는 반면 천천히 인기를 얻어서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는 것도 있다. 냉면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통적인 냉면집들이 오랜 고객들의 입맛을 잡았다면 지금은 새롭게 등장한 냉면집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이러한 냉면 트렌드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내 생각에 자극적이지 않고 섬세한 맛, 스타일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러한 예는 다른 곳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립밤의 대명사인 챕스틱 검은색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기본형이다. 몰스킨 같은 다이어리는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여러 변형된 형태가 등장하고는 있지만, 가로선을 그어둔 기본 모델이 여전히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것을 살펴볼 때 자극적인 외부 환경도 많이 존재하나 우리는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하며 단순한 것에 더 오랫동안 끌리고 마음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이처럼 유행을 타는 것과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다만 차이점은 진폭이 얼마나 짧고 높이가 높은가 하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와인분야는 그 진폭이 매우 넓고 낮은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와인 맛에도 이런 유행의 흐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와인 애호가들에게 자주 회자되던 단어는 프룻밤(Fruit bomb: 과일 폭탄)이었다. 특히 호주나 신대륙 와인들에게서 많이 등장하던 와인들로서, 파커가 좋아하는 와인이 프랑스 론 스타일이라거나, 호주의 진한 쉬라즈 계열이 높은 점수를 받음으로써 많은 포도원들이 이를 추구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나 높은 알코올의 와인들, 그리고 완벽한 풀 보디 와인들에 대한 고객들의 선호도가 바뀌기 시작한 이후로 와인의 유행은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2013년경 나는 몇몇 와인 전문가들과 함께 파머스 립(Farmer’s leap) 와인을 버티컬 테이스팅 할 기회가 있었다. 이 당시 와인 설명에 2009년경부터는 포도원이 와인 스타일을 많이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주 와인도 보다 미디엄 보디에 가깝도록 하고, 과실의 느낌이 과도하게 되어 오히려 탄 느낌이 날 정도의 진득함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양조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어떤 슴슴함의 깊은 맛이 오히려 고객들의 발길을 더 오래 붇잡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구대륙 와인에 대한 오마주가 있어서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스타일이 좀 더 미디엄 보디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신대륙의 와인은 구대륙의 전통적 스타일에 대한 설명되지 않는 오마주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신대륙에서 론 스타일을 따라 만들거나 부르고뉴 스타일의 피노를 만들려 애를 쓴다. 미국에도 론 레인저(Rhone rangers)라는 부류의 포도원들이 따로 있을 정도로 론 지역의 스타일을 지향하는 포도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타블라스 크릭(Tablas Creek) 같은 포도원을 예로 들 수 있다. 최근에는 부르고뉴 스타일의 와인을 미국에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많이 경주되어 캘리포니아에서는 멋진 피노 누아르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생산량이 많지 않고 가격이 높아 국내에 수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으나, 약간의 달콤함 이면에 멋진 산도와 집중력, 부르고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테루아의 느낌을 주는 관조적 느낌까지 캘리포니아의 피노 누아르는 반드시 주목해야 할 와인이다. 이 와인들의 방향성 역시 슴슴하고도 기분 좋은 산뜻한 과실의 느낌이다. 좀 더 자연스럽고 소박하다. 그렇다고 우아함을 잃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전통에 대한 수렴일까, 진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수준의 유행의 변화나 트렌드의 변화로 보아야 할까? 나는 이것이 트렌드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이 과거 보디감이 있는 스타일을 좋아했다면(물론 내 주변에는 아직도 풀 보디 레드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이제는 서서히 여성적이고 섬세한 와인을 찾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유행은 그때 그때 특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큰 맥락의 와인 시장 변화는 유행과는 무관하게 흘러간다고 볼 수 있다. 큰 맥락의 와인 시장 변화는 스파클링 지향, 화이트 지향, 섬세함 지향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여성들과 즐기거나 집에서 즐기기, 혼자 즐기기에 너무 보디감이 센 와인은 거부감을 줄 수 있다. 어쩌면 풀 보디는 너무 강하여 빨리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더 쉽게 마시게 하도록 만들려고 이런 스타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와인의 스타일들이 섬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나파 지역의 카베르네 소비뇽도 최근 맛을 보면 떫거나 무거운 터치보다는 좀 더 잘 익은 과실의 풍미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질감도 매우 부드럽게 만든다. 입 안의 보디감은 미디엄 풀 보디, 혹은 풀 보디가 나타나지만 그 내면의 변화는 꽤나 여성적이다. 이런 변화는 와인 맛에 있어서 인위성을 배제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와인 시장이 어떻게 흘러가든 이러한 스타일이 지향점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여성적이고 섬세한 맛의 와인을 시장에서 더욱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 만들기(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