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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Mar 19. 2019

와인에도 영혼이 있을까?

나는 영혼을 믿는 사람이다. 신이라는 어떤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게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없다고 답한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서 공통된 부분을 살펴보니 결국은 같은 것에서 출발하고 결국에는 무(無)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간단하게 나를 생각해서 본다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나의 육신을 일깨우는 것은 영혼이다. 영혼은 끊임없이 몸과 싸운다. 술을 더 마시고 싶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 욕정을 느끼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육신의 세계를 바르게 이끌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쓰는 기계, 오늘 내가 올라타는 고속전철, 잠자리에 들 때 때가 묻은 베개 하나하나에 다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만물이 자신만의 역할을 묵묵히, 힘들지만 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그런 과정에는 결과가 있듯이, 그 일련의 결과물은 부스러기로 남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영혼은 부스러기를 만든다. 사람은 사랑을 하여 사람이라는 후손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부스러기로도 영혼의 후손을 만든다. 글이 그렇고 건축물이 그러하며, 미술품이 그러하고, 남을 가르치거나 전파함으로써 내 영혼의 부스러기가 전달 된다.


그렇다면 왜 그 부스러기는 보이지 않을까?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보는 것, 듣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존한다는 것은 점차 중독된다는 것이며, 멈추면 금단현상이 온다. 눈 감고 이동할 수 있는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말을 할 수 없다면, 와인 전문가라면 맛을 느낄 수 없다면, 냄새를 맡을 수 없다면? 선천적으로 이 능력이 없는 장애우들을 제외하고 우리 육신은 이 능력에 중독되어 있다. 영혼은 이 육신을 떠날 때 중독된 몸을 내려놓고 떠나간다. 그렇게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 우리 일상이자 인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혼에 있어 육신은 잠시 머물다가 갈 뿐이다. 이 영혼에게 있어 육체는 큰 틀에서 스쳐 가는 인연인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일까? 육신이 본질일까? 영혼이 본질일까? 본질 자체는 의미가 없을수도 있다. 다만 명징한 것은 둘이 물질의 도움으로 영혼끼리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글로 나의 영혼 부스러기와 대화를 하는 셈이다. 영혼과 영혼이 아니라 영혼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 대화한다는 기이한 생각을 하는 나라는 몸뚱이 역시 기이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이러한 느낌은 와인에도 고스란히 남는듯 싶다.(모든 사물이 그러하겠지만.)


나는 영혼을 일종의 진동, 떨림이라 생각하며 과학의 개념으로 보면 초끈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멀리 있어도 느껴지고, 가깝게 있으면 더 선명하다. 모든 와인은 자신만의 떨림을 갖고 있고, 그 떨림은 다시 우리 육신을 통해 뜻을 전할 것이다. 교감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무인도에 있으면 멀리 남극이 있는지 펭귄이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와인의 영혼과 교감한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몸을 통하듯, 와인의 영혼은 와인이라는 물질을 통해 그 뒤에 숨은 영혼에게 내 뜻을 전할 것이다.


와인의 영혼 역시 와인을 통해서 그 뜻을 우리 혀와 코를 통해 영혼으로 전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두 영혼은 만나게 된다. 그 만남 뒤에 있는 와인의 영혼은 다시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고, 매개체로 삼은 와인은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우리 몸을 지나서 빠져나가면 그 이후에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물질은 윤회하고 에너지의 불규칙성과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으로 진행되며 영혼은 스쳐 간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인연법인가 보다.     


이 스쳐가는 인연이 아름답고 소중하여 나는 그 인연을 늘 글로 남기려 애쓴다. 글이라는 것 역시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책이 불타거나, 컴퓨터의 메모리가 삭제되면 글은 무(無)의 상태로 넘어간다. 일종에 나의 영혼 부스러기가 남아서 글에 붙어있으나, 그것이 사라지면 그 영혼 부스러기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릴 것이다. 모든 와인과 만남이 이럴진대, 일상의 소소한 하나하나의 만남이 소중하고 곱다. 집착이 하나 남는다면 이것을 조금 더 글로 남겨서 비듬같은  영혼의 부스러기들을 털털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이 집착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할 것이리라. 


그래서 와인을 지식으로, 자랑으로, 소유로 마시려 할 이유가 없다. 페트뤼스든, 로마네 콩티든 베가 시실리아든 모두 잔에 따르면 붉은 색이다. 코를 깊이 대고 그 영혼의 메시지를 빨아들여야 비로소 그 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 잔에다가 페트뤼스라 붙여두고 써둘 것인가? 영혼의 교감에 그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그 와인의 느낌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어떤 아로마가 무엇인지, 남들이 이야기하는 말에 주눅 들 이유도 없다. 오로지 그때 코와 입안에 오는 느낌으로 그 이면에 있는 영혼이 무엇을 말하는지 느끼는 데 집중하면 어떨까? 누군가가 와인을 매개체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다면 더 즐겁고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고 그것은 와인의 맛에서 고스란히 느껴질 것이다. 순수하지 않은 영혼은 없다. 육신이 다르고 육신이 욕망을 가질 뿐이다. 그 이면의 것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함께 호흡을 맞춰보자.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자연의 법칙 앞에서 지금, 이 스쳐 가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 찰나(刹那)가 얼마나 긴 것이던가? 사람이든 와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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