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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Mar 25. 2019

와인을 혼자 마실 때, 둘이 마실때, 여럿이 마실때

얼마전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먹을 때였다. 매장 밖에는 다시 간이 의자와 간이 탁자가 있는 구조의 동네 편의점이었고 쓸쓸한 풍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한 노쇄한 이가 안성탕면 컵라면 작은 크기(이게 아마 제일 쌀 것이다) 하나와 소주 한 병, 그리고 담배 한 대를 물고는 밖을 보면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그냥 돈 없는 남자가 혼자 술이나 마시려니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그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한 편으로는 “저 사람은 어떤 스스로의 나태함으로 저 지경이 되었을까? 자의든 타의든 무너지지 말았어야 하겠지”하는 냉정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간혹 와인을 혼자 마시는 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제법 긴 시간을 밤샘 작업하면서 너무 스트레스가 쌓이면 와인을 한 잔씩 했다. 오히려 시음 느낌도 잘 나지 않고, 그냥 알코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알코올이 긴장감과 제출 마감의 스트레스를 날려주는데는 도움을 주었다. 물론 별로 좋은 방법, 권장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다.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왜 혼자 마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꼭 구분할 이유야 없겠지만,그렇다고 각각이 주는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여럿이 마시는 와인은 즐겁다. 즐겁다 못해 꼭 문제가 생긴다. 즐거움이 과하면 선을 넘어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뒷이야기가 돌게 된다. 여럿이 마실 때에 사람들 마음 속에는 다중적인 면모가 다 있다. 좋은 와인을 갖고 가는 경우에는 내 와인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 내가 주목을 받게 될까, 그리고 그 와인의 맛 자체는 어떨까 하는 스스로의 궁금증, 평소에 마음에 호감을 갖고 있던 어떤 이의 반응이 어떨까 하는 등등 수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평범하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와인, 혹은 와인을 잘 몰라서 대충 와인을 선택할 경우에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일까, 혹시나 내가 갖고 가는 와인이 천대받지 않을까, 남에게 무슨 이야기는 듣지 않을까, 남이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생각은 복잡하고 집중은 어렵게 된다. 그래서 여럿이 마시는 와인은 사실 걷은 즐거우나 속내는 복잡하다. 그리고 반드시 대취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이는 반드시 있다. 그래서 처음은 즐겁고 뒷끝은 쓰다. 소외되는 자도 꼭 생기기 마련이니 말이다.     


둘이 마시는 와인은 좀 복잡하다. 남자끼리 와인을 마시는 경우는 선배가 후배에게 술을 사거나, 아니면 영업 관계가 있는데 고객이 와인을 좋아하거나, 혹은 둘 다 와인을 좋아하는 경우다. 친한 와인 애호가 사이면 평소에 잘 마시는 와인을 내게 된다. 서로간의 답례 성격도 강하다. 그래서 남자 둘이 마시는 와인의 자리는 정치의 자리다. 속내도 꺼내놓게 되고, 부탁하고자 하는 일, 여자들에게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유약함을 꺼내어 서로 울기도 하고 위로도 한다. 와인 소주 역할을 대응하기도 하지만 와인은 그래도 세련된 술이다.     


여자끼리 마시는 와인은 내가 여자가 아니므로 그 심리를 알 수 없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자존심의 출발점이라 본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있는 자리보다 여자들끼리 만나는 자리에 옷을 더 화려하게 입고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장도 더 신경쓰고 말이다. 와인을 마실 때에도 그런 심리가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조사한 샴페인 시음 패턴 조사에서도 여성들끼리 있을 때에는 샴페인을 선택할 확률이 꽤 높은데, 이는 샴페인이나 자신이 아는 지식 등을 이야기 함으로써 상대편을 압도하려는, 그로써 느끼는 우월함을 느끼고자 하는 여성의 허영심이 반영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 해 본다.     


처음 만나는 남녀가 마시는 와인은 유혹이다. 유혹의 줄다리기다. 그 척도는 와인이다. 장군 멍군과 같은 체스 게임이다. 그리고 이 자리의 패자는 언제나 남자다. 궁극적 패자가 남자의 지갑이 되든 어떤 경우든 남자의 패배다.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 해도 남자는 패자다. 와인의 선택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와인을 잘 모르던 그녀도 함께 와인을 마시다 보면 “내가 무슨 와인을 마시고싶어하는지 오늘 맞춰봐. 내 기분을 이해하는 척도를 와인으로 판단해주겠어. 나에 대한 애정도 말이지.” 이런 상태로 넘어가게 된다. 당연히 처음에는 유혹의 척도로 사용된 와인이 이제는 남자의 발목을 꼼짝없이 잡게 된다. 이 상황을 중장기적으로 해소하려면 빨리 결혼을 해서 집에 팩와인과 데일리 와인을 들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돈을 많이 벌어서 매일 훌륭한 와인을 상납하는 방법 밖에 없다. 아니면 헤어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혼자 마시는 와인은 여행이다. 사람은 본디 태어났을 때 혼자다. 부모님이 계신다고? 아니다. 일방적 돌봄이다. 상호 교감은 동물적인 반응일 뿐이다. 말을 배우고 보육원을 나가게 되면서 서서히 사회생활을 얻게 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은 사회의 굴레 속에 죽을 때 까지 본인을 맡기게 된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큰 분량의 스트레스를 떠맡기는데, 간혹 훌훌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의 여행 패턴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혼자 여행을 가고 싶은 1단계다. 나도 중고등학교때 혼자 여행이 그토록 가고 싶었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지 못한 혼자 여행을 이번에 진학한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러다가 친한 친구가 생기거나 MT 등이 있으면 단체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러다가 둘이 간다. 신혼 여행이다. 그 다음으로 가족이 되면 여행이 없어진다. 일상의 육아 스트레스현장이 집에서 잠시 리조트로, 그리고 호텔의 욕조로 옮겨다니면서 여행은 사라진다. 파리의 에펠탑도 유모차의 아기와, 4~5살 된 첫째의 질주를 막고 길을 잃어버린 기억 밖에 없어진다. 어느덧 사라진 나, 그 사이에 유일하게 내 옆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다시금 혼자로 돌아오는 나를 바라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혼자 마시는 와인과 혼자 가는 여행이다. 나는 혼자 장거리 출장이 많다. 긴 거리를 운전하거나 SRT를 타다 보면 사색에 잠기게 된다. 일로 가니 마음은 무겁지만 눈은 휴식을 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스스로에게 고행을 주게 되는 과정일 것 같다. 그래서 순례자의 길을 가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제주 올레길도 그러하고 말이다. 사실 혼자 여행도 너무 좋아하면 고독해지고 우울해지며 중독된다. 혼자 마시는 와인도 과해지면 자기 합리화에 빠지고 알콜 중독으로 빠질 위험성이 크다. 그래서 늘 혼자 무엇인가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에 중독되기 십상이다.     


내 제안은 이 세 가지 패턴이 균형을 잡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두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비율은 개개인마다 다르고 가치관마다 다를 것이며,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니 어떤 비율이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는 않겠다. 다만 세 가지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것은 내 영혼이 알아서 시기를 말할 것이다. 십자가를 이고 가는 이 육신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것은 신도 아니고 오로지 내 영혼일 터이니 말이다.     


오늘은 이 글을 읽는 이에게 영혼의 평안과 와인의 즐거움이 늘 함께하기를 기도 해 본다. 모두에게 평안과 와인이라는 친구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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