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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Feb 20. 2018

애태운다고 떠난 버스가 돌아오진 않는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수밖엔

어머니집은 깡촌은 아니지만 번화한 도시도 아니다. 동네를 오가는 버스는 10-20분에 한대씩 다니지만 시를 벗어나는 버스는 짧게는 20분, 길게는 30~40분에 한대씩 다닌다.


건강 문제로 휴직을 하고 요양차 어머니집으로 거처를 옮긴지 2개월째. 버스시간을 맞춘다고 맞춰서 집을 나섰는데 눈앞에서 타야할 버스를 놓쳤다. 30분에 한대씩 다니는 그 버스를.

대중교통 어플로 약속지점에 가는 다른 교통편을 검색했다. 1~2번 버스를 갈아타면 갈수 있었지만 1번은 방금 놓친 그 버스를 꼭 타야했다. 택시를 타지 않으면 30분 동안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휴직한 마당에 1만원을 내고 택시를 탈순 없었다)


'놓친 그 버스만 탔어도 약속시간에 여유있게 도착할수 있는데...'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던 5분, 집을 나서기 전 화장실을 들렀던 2분, 운동화를 신을까 부츠를 신을까 고민했던 1분. 집을 나서기 전 했던 모든 행동들이 머리를 스치며 후회가 밀려왔다.


얼마나 자책을 했을까. 내가 아무리 애를 태운다고 한들, 지나간 버스가 되돌아올리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저 받아들이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 말곤 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사귀었다 헤어진 전 남친과 이별하던때가 떠올랐다. 선유도에서 4시간을 울면서 매달리고 한달 동안 아침 저녁으로 손편지를 배달했지만 그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때 몸으로 '포기'와 '체념','수용'의 진짜 의미를 처음 배웠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30분이 흘렀을까. 다음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강추위는 가셨다지만 30분을 야외에서 떨다가 버스를 타서인지 버스 안 온기에 온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버스 안 온기로 언 손에 피가 돌때쯤인가. 아등바등 살았던 나 자신이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다. 컨트롤 할수 없는 상황은 아무리 애를 태운다고 바뀌지 않는데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되지 않은 누군가와의 관계나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속 일이 쏟아지고, 끝나지 않는 업무의 홍수 속 그를 해결하지 못해서 자책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죽을만큼 노력한다면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도 바꿀 수 있다는 치기였을까. 포기해버리면 바로 주저앉을것만 같은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왜 그랬는지, 혹시 앞으로도 그럴지 나도 아직 모르겠다.


지금은 머리로만 알고있는 포기와 체념, 수용을 몸으로 마음으로도 알고 싶다. 아무리 발을 동동 거려도, 재가 되도록 마음을 태워도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내가 부린 약간의 게으름이 그 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정도는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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