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를, 조직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 더 착취당하는 아이러니
A는 왠만해서는 "못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야근이, 주말 근무가, 업무가 많아도, 곤란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못 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누구든 어깨너머로도 보이는 그 표정을 부장은, 팀장은 보지 못했는지, 보고도 모른척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임신 초기에도 장거리 출장을 여러차례 갔고, 회사 내에서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임신 후 받는 부서이동 배려를 받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모든 사람이 똑똑히 지켜봤다.
"인사이동을 강하게 요구하라"는 동기들의 채근에 그는 "자신이 빠지면 남은 후배들이 너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팀장을 빼곤 해당 팀에서 가장 오래 일한 베태랑이었다.
넌지시 부서이동 의사를 타진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렸긴 했지만, 부팀장급인 자신이 빠지면 팀원들이 한동안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판단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B가 먼저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야근과 주말 근무, 업무 배분을 위한 자발적 지원을 받을 때 그가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순번이 돌아오는 당직은 어떤 이유인지 자주 빠졌다. 추가 업무지시가 내려오면 "진행중인 업무가 있다"며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부장과 팀장은 지시를 슬그머니 접었다.
B는 늘 업무성과가 좋았는데 해당 업무를 오래해서 전문성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 전문성이 결국 근거이겠으나 관리자의 지시에 맞서)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성향과 판단에 따라 직장생활을 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에 대한 판단 역시 각자의 몫이다.
A와 B는 각자의 스타일대로 일하고,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각자 받고 받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 것은 업무스타일을 두고 선악 평가나 시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내가 겪었던 대부분의 조직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료를 위해, 조직을 위해 좀 더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이 몰리는 모습을 본것이 유쾌하지 않는 경험이란 점은 분명하다.
"호의가 이어지면 호구인줄 안다"는 말이 '만국공통어'인냥 통용되는 것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호의에 반드시 호의로 응답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불이익을 당해서는(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우리는) 저 말을 너무 자주하고 너무 자주 듣는다.
(물론 나는 A같은 호의가 넘치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B같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서서 일을 하겠다고 나선적이 없고 주어지는 지시를 군말없이 하지도 않았다.
불만을 잔뜩 토해내면서도 지시에 결국 굴복한 뒤 상사 뒷담화를 까고 (내 판단으론) 부적절하거나 마뜩치 않은 지시도 결국은 꾸역꾸역하고는 욕하는 소심한 인간이었다)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호의를 호구취급으로 돌려주는 관리자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말없이 견뎌내는 사람에게 업무지시하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대는 사람에게 업무지시하는 것보다 곱절 이상 쉽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해내야 하는 사람이 관리자가 아닐까.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안 한다는데 다른 사람이, 평양감사처럼 힘 있고 뽀대나는 일이 아닌, 힘들고 피곤한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관리자가 일반 직원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닌지.
(아무도 나 따위에게 묻지 않겠지만) 누군가 내게 '호의=호구'가 되는 조직에서 호구들의 인내심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물음표를 던지련다.
호구들은 언젠가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고 호구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동료와 조직을 위한 호의 따위는 보이지 않으려고 할테니.
만국의 호구들이 단결하기 전에 관리자들이 '그 어려운 일'을 좀 잘 해내시면 좋겠다. 호구가 되는 것도, 호구를 지켜보는 것도 너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