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스코리아

촌스러운 꽃무늬 원피스에 빨간 립스틱

by 꽃님

11살 여자아이들 4명이 모였다. 그중 혜주가


"진숙아, 우리 오늘 미스코리아 놀이하러 진경이 집에 갈 건데. 너도 올래?"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반에 조금 예쁘장한 아이들 4명이 있다. 이 아이들이 가끔 모여서 재밌는 놀이를 한다는 말은 들은 것 같았다. 초대를 받아야 갈 수 있었는데 오늘 그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았다.

너무 기쁘고 설레어 단번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진경이가 미스코리아 참가 조건이 있다고 했다.


첫째, 드레스는 2벌 준비할 것

둘째, 구두 필수

셋째, 립스틱 가져올 것


그리고, 제비 뽑기를 해서 심사위원이 될지, 참가자가 될지 정한다고 했다. 집으로 온 나는 드레스가 있는지 찾아봤다. 그러나 드레스는 없었다. 옷장을 열어보고 서랍을 열어봐도 드레스는커녕 그 흔한 원피스도 없었다. 엄마가 장사를 하느라 온통 몸빼바지와 티셔츠뿐이었다. 옷장에 걸려있는 옷을 하나씩 보다가 꽃무늬가 있는 하늘하늘한 여름 원피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벨벳으로 된 보라색 긴치마도 찾아냈다. 나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어봤다. 반팔이라 소매는 길지 않았고 치마길이도 드레스처럼 복숭아뼈까지 내려왔다. 유레카!


"얏호! 이거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벨벳으로 된 보라색 긴치마도 입어봤다. 치마를 가슴까지 올렸더니 제법 드레스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벨벳의 느낌도 좋았다.


"엄마는 이런 치마를 언제 샀지? 입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혼자서 중얼거리다 이번엔 신발장을 뒤졌다.


'구두가 있을까?'


엄마가 구두 신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엄마들이 신는 굽 낮은 신발이거나 뒤가 트이고 굽이 조금 있는 슬리퍼를 신고 다녔던 것 같다. 역시 신발장 안엔 구두가 없었다. 약간 굽이 있는 샌들이 있긴 했는데 드레스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참가자 자격을 갖춰야 하기에 굽이 조금 있는 엄마 샌들을 챙겼다. 그리고 또 하나.

엄마의 립스틱을 찾아보았다. 엄마가 예전에 빨간색 립스틱을 발랐었는데 어디에 두었을지 생각했다. 털레비전 아래 잡동사니를 넣어둔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었더니 몽땅하게 생긴 눈썹을 그릴 때 쓰는 펜이 있었고 립스틱 한 개도 있었다. 립스틱 뚜껑을 열었더니 다 쓰고 안쪽이 움푹 파여 새끼손가락을 찍어서 발라야 할 정도의 양만 남아 있었다. 드레스 2벌, 굽이 있는 구두(실은 샌들이지만 구두라고 우길 참임), 립스틱 한 개. 참가자격을 갖추고 진경이 집으로 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잘 정돈된 정원이 있고 정원사이에 돌이 깔린 길을 따라 들어가면 현관문이 있다. 진경이 방은 2층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집안에 계단이 있는 집을 들어가 보았다.

진경이 방에 혜주, 소희, 미해 이렇게 앉아 있었다. 내가 오자 진경이는 제비 뽑기 종이를 내밀었다.


"자. 뽑아. 동그라미가 있는 걸 뽑으면 그 사람이 심사위원이 되는 거야."


각자 한 개씩 뽑았다. 오늘 심사위원은 진경이가 되었다. 조금 실망한 표정을 보였지만 진경이는 흔쾌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런 진경이가 더 좋게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미스코리아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진경이가 대회 시작을 알렸고


"첫 번째로 드레스 심사가 있겠습니다. 준비해 주시죠."


진경이 방 한쪽에 파티션이 있고 방 가운데는 붉은 융담요가 깔려 있다. 우린 파티션에서 옷을 갈아입고 붉은 융담요 위로 한 명씩 걸어가서 진경이 앞에 서면 진경이가 점수를 매긴다.

난 무엇을 먼저 입을까 잠시 고민을 했다. 첫 번째 드레스로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순서도 정했는데 내가 맨 마지막이었다.


"자, 참가번호 1번 나오시죠."


진경이의 말이 떨어지자 1번인 혜주가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멋지게 걸어 나갔다. 혜주는 분홍색 진짜 드레스를 입었다. 목둘레에 진주가 여러 개 박혀 있는 예쁜 드레스였다. 2번 미해는 나처럼 엄마 원피스를 입었지만 오른쪽 가슴에 장미꽃 브로치가 달려있는 정장원피스라 드레스처럼 보였다. 소희도 혜주처럼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나가서 잔뜩 포즈를 취하며 뽐내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난 당당하게 한 손을 허리에 대고 모델처럼 걸어 나갔다. 나를 본 진경이의 표정이 처음엔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내가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가자 웃음을 참기 위해 입에 잔뜩 힘을 주고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며 심사 종이를 만지작 거렸다.

결국 웃음 참기에 실패한 진경이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촌스러운 꽃무늬 여름 원피스, 내 입술보다 더 크게 그린 빨간 립스틱에 낡은 샌들까지. 얼굴을 쳐들고 진지하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내 모습에 진경이는 쓰러졌다.


"미안,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와서. 미안."


자기가 웃어서 내가 기분 상하는 게 걱정이 됐는지 웃으면서도 진경이는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진경이는 웃음이 한 번 터지면 잘 멈춰지지 않는 듯 했다. 애써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진경이를 보던 아이들도 전염이 된 것처럼 하나 둘 주저앉아 웃었다.


"괜찮아, 내 드레스가 좀 화려하지? 드레스엔 화려한 꽃무늬가 있어야지. 하하하."


나도 친구들과 같이 웃었다. 더 크게 웃었다.


"어딜 가든 네가 최고야. 너만큼 잘하는 애는 없어. 기죽지 말고 어깨 펴고 당당하게 다녀."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나만 보면 하시던 말씀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긍정적, 당당함, 열정 이 세 단어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해도 늘 씩씩했고 당당했으며 온 힘을 다해 열정을 쏟아냈다. 요즘 아이들 말로


"이게 나야!"


인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이 4명의 미녀 4 총사와 친해졌다. 그 후로 미스코리아 놀이를 계속했고 그때마다 진선미 안에 들지 못했다. 그래도 미스코리아 놀이를 한다고 할 때면 꽃무늬 원피스와 굽 있는 샌들, 그리고 빨간 립스틱을 챙겼다.


"엄마, 나도 치마 사 줘."


"뭐야? 머슴아처럼 바지만 입고 치마는 싫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치마를 다 사달래?"


"아니... 나도 다른 애들처럼 치마 입고 싶으니까 그렇지."


며칠 후 엄마는 치마 대신 가슴에 리본이 달린 분홍색 원피스 잠옷을 사주셨다. 난 미스코리아 대회에 그 잠옷을 가져가서 입고 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가 날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