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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난

절대로 하면 안 돼

by 꽃님

내 기억 속 아빠는 통이 넓은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반달모양 눈매에 옅은 미소를 띤 모습이다. 나의 기억에 아빠가 화를 내는 모습이 없는 걸로 봐선 화를 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치명적인 잘못을 했을 때도 아빠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동네에 지능이 조금 낮은 내 또래 여자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자 아이를 바보라고 놀렸다. 여자 아이는 아이들이 돌을 던지고 놀려도 도망가지 않고 웃으면서 돌을 맞았다. 한쪽 코는 누런 콧물이 숨 쉴 때마다 들락날락했고 양손 소매 끝자락엔 콧물을 닦은 자국이 풀 먹인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늘 혼자 돌아다니며 땅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먹었다. 언제는 우리 집 개 밥을 손으로 뒤적뒤적한 적도 있다. 엄마는 그 아이를 불러 삶은 감자와 고구마를 주며


"얼른 집으로 가거라."


하며 아이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아이는 소매로 코를 쓱 닦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막 겨울이 사작 된 다사한 날이었다. 집 앞에 물이 흐르지 않는 배수로가 있었는데 넓적한 돌로 덮은 배수로는 어린아이가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배수로 위로 어른 키보다 조금 높은 네모난 모양의 볏짚단이 있었다. 2미터 길이의 배수로는 어린 내가 숨어서 노는 비밀공간이었다. 이제 막 비밀공간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


"하, 왜?"


뒤를 돌아보니 그 여자 아이였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놔. 놓으라고!"


잡힌 발목을 위아래로 흔들며 소리쳤지만 여자아인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시 밖으로 나온 나는 한참을 째려보다가


"들어갈래?"


손으로 배수로를 가리키자, 누런 이를 내보이며 그러겠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실 여자아이와 함께 노는 아이는 내가 유일했다.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공기놀이를 하는데 그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너 공기 할 줄 알아?"


하고 말을 건넸다. 아이는 대답 없이 그냥 내 앞에 와서 앉았다.


"내가 먼저 한다."


나는 아직 공기를 잘하지 못했다. 공기를 던져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바닥에 있는 공기를 잡았다.


1단, 2단, 3단, 4단, 고추장, 꺾기...... 공기를 던져서 손 등에 올라간 공기를 떨어뜨리지 않고 다시 던져서 받았다. 손안에 있는 건 공기 한 개뿐이었다.


"너, 해봐."


여자아이가 공기를 잘하는지 지켜봤다. 여자아이는 공기를 잡고 내가 했던 것처럼 위로 던졌다. 공기가 바닥에 그냥 떨어졌다.


"뭐야, 공기 못 해?"


대답대신 또 누렁니를 보이며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공기 한 개를 위로 던지더니 다른 한 개를 던지고 또 다른 한 개를 던졌다. 그러더니 날 보며 또다시 누렁니를 보이며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피식하고 나왔다. 공기를 던지고 누렁니를 보이며 해맑게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날 이후 난 여자아이와 함께 놀았다.


배수로 안은 쌀쌀했다. 나와 여자아이는 웅크리고 앉아서 머리 위 돌 사이로 삐죽삐죽 나와 있는 지푸라기를 한가닥씩 뽑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지푸라기 몇 가닥을 모으고 이걸 태우면 따뜻해질 텐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냥 생각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아이가 밖으로 나가더니 곧 성냥을 들고 들어왔다. 내 생각을 읽은 건가? 내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건가?


나는 성냥을 켜서 바닥에 모여있는 지푸라기에 불을 붙였다. 지푸라기가 조금씩 타들어가고 있을 때 여자아이가 불이 붙은 지푸라기 한 개를 머리 위로 삐죽삐죽 나와 있는 지푸라기에 갖다 댔다. 난 하지 말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신 나서 다른 지푸라기를 들어 머리 위 그 삐죽빼죽 나와 있는 지푸라기에 갖다 대었다. 갑자기 매캐한 연기가 배수로 안을 돌아다녔다. 나와 여자아이는 기침을 해댔고 매운 연기 때문에 눈을 비벼댔다. 배수로 위에 쌓아둔 볏짚단에 불이 붙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마을 어른들이 다 나와서 양동이를 실어 나르며 불을 껐다. 그 사이 배수로 입구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우릴 불렀고 무서운 나머지 옴짝달싹 못하는 우리를 누군가 잡아 올렸다. 알고 보니 배수로 입구에서 큰오빠가 우리 보고 나오라고 소리쳤고 가만히 있는 우리가 더 위험해지기 전에 배수로를 덮고 있던 돌을 들어내어 우릴 꺼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나를 엄마는 얼른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고 여자아이도 엄마가 와서 데려갔다. 아빠와 오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간신히 불은 꺼졌다.


엄마는 내가 놀랐을까 봐 한참을 안아주다 꼬질꼬질한 내 몸을 깨끗하게 씻겨 주셨다.

그리곤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를 잤는진 모르겠다. 아빠는 언니 보러 날 업고 가게에 가서 과자를 사주라고 하셨다. 아빠한테 크게 혼날까 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아빠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셨다. 언니 등에 업혀 밖을 나가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늘은 밝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중에 커서 들은 얘기는 아빠도 이날 많이 놀라서 며칠을 못 주무셨다고 했다. 내가 더 놀라 잘못될까 봐 걱정만 하셨다고 했다.


자식이 잘못될까 봐 혼내지도 못하고 놀란 가슴을 혼자서 달래야 했던 아빠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른이 되어 나 같은 자식을 키우며 어느새 나도 점점 아빠를 닮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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