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장이 있는 날이다. 학교 운동장에 우리 학교 학생 외에 다른 학교 학생들도 있다. 우리는 차례대로 기다리며 오래 매달리기, 윗몸일으키기, 50미터 달리기, 오래 달리기 등을 했다. 내가 가장 못했던 건 오래 매달리기였다. 철봉을 잡고 올라가 무릎을 구부린 채 턱을 철봉에 대고 매달리면 기록을 잰다. 보통 여자아이들은 1분을 넘기기도 한다. 난 매달리자마자 1초도 못 버티고 떨어졌다. 희한하게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왜 오래 매달리기만 못하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체력장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데 씩씩거리며 성희가 다가왔다.
"내일 학교 끝나고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놀이터로 나와."
"왜?"
"오늘 우리 학교 애가 저쪽 학교 애한테 맞았어.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맞았어. 그런데 선생님이 오셔서 반격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내가 그 애한테 말했어. 가만 안 둔다고 한판 붙자고 했더니 걔 주변 친구들이 듣고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덤비라고 했어. 그래서 나랑 맞은 애, 그리고 같이 있던 애들 몇몇 하고 내일 놀이터에서 5시에 보기로 했어."
"진짜, 나갈 거야? 근데 나는 왜?"
"넌 태권도도 하고 합기도도 하니까, 네가 꼭 있어야 돼."
"아... 난 싸움 싫어하는데, 한 번도 싸워본 적도 없고."
"야! 우리 학교가 다른 학교 애들 앞에서 무시당했다고. 이건 맞은 애 문제만이 아냐! 우리 학교 명예가 달린 문제라고. 이대로 있으면 우린 계속 무시당할 거야. 그래도 좋아?"
성희는 진지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날 무섭게 쏘아보며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거절할 분위가 아니어서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나, 진짜 싸움 못하는데.
오후 5시 그날이다. 우리 학교 여자애들이 놀이터로 모여들었다. 바지는 다 푸른색 운동복이었지만 윗옷은 다 재각각이다. 우린 한 줄로 나란히 섰다. 난 맨 가장자리에 섰다. 놀이터엔 마침 아이들이 없었다. 참 다행이다. 험악한 모습을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없다는 건 어쩜 오늘 이 싸움은 하늘이 허락한 싸움인지도 모른다. 보호장비 없이(태권도 시합 외에) 사람을 한 번도 때려본 적이 없다. 아니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그 흔한 말싸움도 말이다. 당최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는다는 걸 힘들어하는 성격이라 웬만하며 맞춰주거나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피하는 편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며 착하게 살았더랬다. 그런데 지금 내가 패싸움이라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한다. 숨이 점점 가빠온다. 손엔 땀으로 축축하다. 저 멀리 적이 보인다.
'이제 시작인 건가.'
떨리는 순간이다.
"야! 아주 떼로 몰려왔네."
적의 대장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아예 없었던 게 아니었다. 놀이터 입구에 있는 시소에 어린 여자아이 둘이 시소를 타고 있었다.
성희가 적장을 쏘아보며
"오늘이 니들 제삿날이다. 덤벼!"
소리와 함께 달려 나가는 찰나에 시소에서 떨어지는 아이가 보였고 그 아이를 필사적으로 잡기 위해 시소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우는 아이를 안아주며 달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들 꼼짝 마! 그대로 있어. 모두 앉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학교와 저쪽 학교 선도부 선생님이 나온 것이다.
"이 녀석들 대낮에 겁도 없이 싸움질이야?"
누군가 일렀구나. 젠장. 시간을 딱 맞맞춰 나오셨다. 선생님들은 아이들 모두 도망가지 못하게 자리에 앉히고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아이들을 해산시켰다. 선생님은 날 보지 못했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시소 옆에 서 있는 날 같은 패거리로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어쩌지. 그렇다고 선생님한테 다가가서 저도 그랬어요.라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대첩은 주먹 한번 날려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이 났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혼자 멍하니 서 있었다. 시소를 탔던 어린아이가
"언니, 나 시소 태워줘."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하며 시소를 탔다. 아이가 시소에서 떨어져 줘서 참 다행이다. 때마침 선생님들이 와주어서 참 다행이다. 내가 누군갈 때리질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