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누워 다원이를 재우는데
“엄마 오늘 아멘 할까?” 나에게 묻는다.
기도를 하자는 뜻이다.
나는 기독교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예배를 하고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을 맞이하는 건 값지지만 사람과의 나눔을 좋아하지 않아서 교회에 나가기 어렵다. 외톨이로 교회를 다니다 누군가 나에게 사적으로 다가오는 일이 생기면 그 교회는 다시 나가고 싶지 않다. 그렇게 교회에 발 들인 지 오래다. 그저 일상에서 기도를 드린다. 시간이 될 때, 그리고 생각의 흐름에 따라서 기도를 드린다.
어젯밤 다원이의 기도 내용은 이러했다.
“엄마 아빠랑 내가 동시에 죽게 해 주세요.”
이게 웬 충격적인 기도인가. 다원이의 기도를 듣다가 중간에 끊었다.
“다원아! 사람이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셔.”
다원이는 엄마 아빠가 시간이 지나면 죽음을 당연하게 맞이해야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일곱 살 다원이가 죽음에 대해 잘 아는 건 우리 부부의 양가 부모님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경험을 했고 우리는 그 경험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다원이에게 이야기해줬다. 어떤 사람은 아이에게 죽음이란 부정적인 소재를 이야기할 필요 없다고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마음은 모두가 똑같을 텐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리고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선 죽음에 대해 잘 이해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하늘로 올린 나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엄마 병이 낫게 해 주세요. 저는 엄마 없이 살 수 없어요.” 결국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내 기도를 과연 듣기는 한 걸까? 의심과 분노가 생겨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이가 올리는 간절한 기도는 들어주신다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나는 그렇게 종종 하늘에 대고 원망과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또 기도를 드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해 주세요. 돌아가신 엄마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요.
나의 기도는 부모에게 투정 부리는 아이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나 힘들어요! 그렇게 일방적인 요구에 불과한 기도들이지만 내가 한 기도, 내가 생각한 일들이 현실화되는 걸 느꼈다.
내 기도를 듣지 않았다고 의심하던 많은 순간들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다 듣고 계셨구나. 어느 날은 꿈속에 알 수 없는 환한 빛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곤 나에게 “혜리야. 내가 항상 너의 곁에 있었다.” 딱 이 한마디만 하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나는 의심을 할 수 없게 됐다. 지금껏 올렸던 나의 기도들이 비록 그대로 되지 않았다 해도 다 의미가 있었구나.
어린 다원이의 기도는 하-늘에 올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마음을 다원이에게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엄마가 없어도 살 수 있게끔 나에게 용기의 마음을 주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