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위한 배려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아이폰 액정 화면에 두 글자가 뜬다
“아들”
받을까 말까 망설인다.
딸의 전화라면 회의 중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는다.
딸의 전화는 “OO 이 하트 하트 하트” 로 액정에 나타나고 나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우리 OO 하트 하트 하트님…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와 콧소리 넣고 애교 넣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데 왜 나는 아들의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일까?
심지어 전화를 받고 나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무뚝뚝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왜?”라고 짧게 응답한다.
남편의 전화는?
그래도 “여보세요. 응? ” 정도로는 받는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전화로 잦은 말다툼을 했던 것 같다.
낮에 회의를 할 때도 있고, 업무에 집중해서 바쁠 때도 많은데 “엄마,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이렇게 부탁해도 상대방의 상황을 살피는 배려보다는 “이것만 들어봐. 엄마.. ”하고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바쁜 엄마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맘의 여유가 없다. 곧이어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가고 소리도 데시벨이 올라가면서
”엄마. 지금 못 듣는다고 했잖아. 저녁에 이야기하자.”
“뭐가 그렇게 바쁜데.. 내 이야기 좀 잠깐 듣고 대답 좀 해 주면 안 되는 거야? 뭣 때문에 바쁜데? ”
“야!!! 뭐가 바쁜지가 그렇게 중요해.. 엄마 바쁘다고.. 끊어.. 뚝!”
세상의 모든 아들이 그렇다는 것은 오류이지만 아들과 딸을 같이 키우니 서로 대조가 되기는 한다. 우리 집 아들은 그렇다.
딸은 이렇게 전화를 걸어온다.
“엄마, 지금 혹시 통화 가능해?”
“아니 엄마 좀 바빠.. 급한 일 아니면 저녁에 이야기해도 될까?”
“그래 미안해.. 엄마 그럼 저녁에 보자.. 사랑해.”
이런 배려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따로 가르친 적도 없는데…
편두통이 심해서 가끔 조퇴를 하고 약을 쑤셔 넣고 혹은 집으로 오는 길에 내과에 들려 진통제를 한 방 맞고 와서 가방을 현관 앞에 던져놓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모든 빛을 차단하고 드러누워야 했던 날들이 있었다. 편두통은 겪어 본 사람들만 안다. 어떤 날은 딱따구리가 내 머리를 계속 때리는 것 같고, 어떤 날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압력이 올라가는 날도 있다. 암튼 그런 날 캄캄한 방에 혼자 누워 이 편두통이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면 식구들이 하나 둘 귀가를 해서 방문을 열고 말하곤 했다.
“엄마. 어디 아파?” 아들의 말이다. 이런 상황을 자주 봤지만 오늘 처음 본 것처럼 말했다.
“엄마. 많이 아파? 약 먹었어? 내가 뭐 좀 도와줄까? “ 우리 딸의 말이다. 얼마 후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괜찮은 지 조금 나아졌는지 살펴보고 머리를 짚어 주기도 했다.
“또 아파?” 무심한 남편의 말이다. “너무 아프면 병원에 가 봐.” 속으로 내가 말했다. ’ 병원 진작 다녀왔다고… 어서 방문 닫고 나가기나 해…‘ 어찌 되었든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면서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같이 먹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설거지를 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픈 날이면 내게 따뜻한 한 마디 건네어주지 않는 아들과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살다 보니, 17년을 남편과 함께 살고, 15년을 아들과 살아보니, 이들이 알고도 그러는 것은 아니더라. 잘 몰라서 그러더라. 본능적으로 공감보다는 문제 해결에 특화되어 있고 질문을 하면서 정보를 탐색해 가더라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 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상대가 알아듣도록 이야기하고 친절하게 알려줘야 하더란 말이다.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살피는 조금의 배려가 부족하지만 나도 그렇게 전화를 쌀쌀맞게 받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규칙을 정해서 엄마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통화가 원활하지 않으니 그때 이후에 언제쯤 통화를 하자거나 톡을 먼저 한 후에 통화가 가능한 상황이 되면 대화를 하자거나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약속을 하면 서로 부딪히는 이렇게 사소한 일은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이런 사소한 대화의 착오와 오류 수정의 사례는 아주 흔했다.
“엄마, 오늘 저녁에 뭐 먹을 거야?”
“있는 반찬으로 먹을 거야.”
“엄마 있는 반찬이 뭐냐고? “
“그게 뭐가 중요해. 주는 대로 먹지…”
“중요해서가 아니라 궁금하니까.. 있는 반찬이 뭐냐고?”
아들은 팩트로 세세하게 질문하고 나는 두리뭉실하게 답을 했다.
아들과 대화에서 조금 더 질문의 요지를 잘 파악하고 답을 했어야 했다는 것을 많은 실수 끝에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도 이렇게 매일의 사소한 오차를 맞춰가는 사이에 아들도 저 나름대로는 생각을 고쳐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낮에 전화로 다퉜던 아들이 맘이 다 풀어져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엄마, 나 기분이 다 풀렸어. 낮에는 미안했어. 바쁜데 전화해서 내 이야기만 들으라고 한 것 사과할게 “
친구에게 엄마랑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친구가 말하길 ”엄마가 네 말을 낮에라도 들어줬으면 더 좋겠지만 엄마가 바쁘시고 저녁에 듣겠다고 했으니까 화를 내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은데 “ 라며 솔로몬 같은 지혜롭고 적절한 조언을 해 주었단다. 그리고 아들은 또 친구의 말을 듣고 맞다고 생각했단다.
나도 아들의 사춘기가 버거워 상담도 받아보고 했었다. 나 또한 타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조언을 귀담아듣고 실천해 보기도 하였다.
우리 모두 이렇게 조금씩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는 왜 아들과 혹은 나는 왜 엄마와 다퉜을까?” 하고 다툼을 돌아보기도 하고 타인에게 조언도 구하면서 이 과정을 오롯이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가까운 사이이지만, 내 몸과 같은 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타인이고 사소한 것에서도 부딪히고, 다투고, 다시 사과하고 양보하고 배려해 가는 연습이 필요한 그런 관계인 것이다.
솔로몬 같은 친구의 조언을 듣고 이미 맘을 다 풀고 퇴근한 엄마를 맞이해 준 쿨내 나는 열여섯의 소년에게 나도 말했다.
“나도 사과할게, 다음에는 좀 더 친절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너의 이야기를 조금 더 경청해 볼게.”
그래도 오늘 잠자리에 들 때 아들과 화해하고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어 감사하다. 잘 자라 우리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