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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인지 남편의 등짝이 밉지 않게 되었다.

사랑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어이 엄마가 싫다는 사람과…. 아빠가 실망해서 식음을 전폐했는데…. 이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야?”


어릴 적부터 늘 엄마와 아빠의 자랑이었던 첫째 딸, 내가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이렇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부모와 대척을 하게 될 줄이야?


나는 여섯 명의 누나를 둔

나이가 많은 어머니를 둔

좋은 학벌을 갖추지 못한

작은 회사에 다니는

미래가 불투명한 (부모님의 말로는…)

그러나

미소가 예쁜

기타를 잘 치는

교회 오빠와 사랑에 빠져 버렸었다.


자녀를 제 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보통의 부모님들처럼 우리 부모님도 당신들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 나를 향해 실망과 분노와 낙담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나는 어릴 적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런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버티고 기다렸다.


2년여 기간이 흐른 후 아버지의 환갑잔치에서 고모가 “이제 허락해 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라….”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사실은 아버지의 마음도 그 사이에 좀 누그러지셨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서른한 살과 서른넷 겨울에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었다.


돌아보니 나는 그때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냥 좋았고, 내 뜻대로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쫓았다. 무모하였지만 용감하였다. 그 사랑이 유효기간도 없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다른 많은 젊은 남녀들처럼 말이다.



미숙한 사랑이 고단한 삶에서 휘청였다.


여성의 경우는 아이가 생기기 전 후로 삶의 변화가 매우 급진적이다. 나도 결혼 이 년 만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또 몇 년 흐른 후에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나는 토요일에도 일하는 남편을 출근시키고 친정으로 가서 육아노동을 부모님과 나누어지며 피곤에 절은 몸뚱이를 침대에 던지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안 쓰러워 하셨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내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도 데리고 가시곤 하면서 나에게 잠시 휴식을 선물해 주셨다. 다른 세상의 많은 부모님들처럼 나의 부모님도 시시때때로 나의 구원투수가 되어 주셨다.


남편이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예상하셨듯이 중소기업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남편의 직장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중에 남편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놀라지 마. 걱정하지도 말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너처럼 좋은 학교 나와서 이름 대면 모두 아는 그런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것은 아니야. “ 비아냥거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아직 철없던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회사에서 내가 속한 사업부가 사업을 종료하기로 했어. 내일까지만 나가고 이제 퇴사를 하게 되었어”

“열심히 새로운 일을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데 나는 정말 남편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동을 했다. 울었다. 걱정하지 말라는데 걱정하면서 세상에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남편이 슬퍼하고 자신의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인생을 살았던 나는 남편의 실업이 내 삶에 짐이 될까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어렵게 다른 직장에 들어갔지만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이직을 한 후에 남편은 불안정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더 불안정한 자영업자가 되었다. 자영업자가 된다는 것은 직장인이 놀 때도 일을 해야 하고, 빨간 날(공휴일)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의 생계의 큰 부분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사랑은 휘청대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부끄럽지만… 내 사랑과 결혼의 선택이 바른 것이었는지 의심하기도 하였다. 남편이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어느 날 열한 살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한 침대에서 자고 밥을 함께 먹고 일상을 함께 해도 우리가 서로의 과거로 깊이 들어가서 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왔고 평범한 부모님 덕분에 내가 원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시도해 보고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고작 고등학교 시험 성적, 대학입시, 취업 시에 겪은 미끄러짐과 좌절이 대단한 것인 양 살아왔다. 나는 내 속내를 다 보여주고 가릴 것 없이 어릴 적 이야기도 하고 남편에게 나를 활짝 오픈했다. 그런 나와는 달리 남편은, 남자라서 그런지, 성격이라 그런지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았다.


결혼하고 몇 해가 지나고 시어머니와 어느 날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한 살의 남편,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던 남편의 과거, 상실 그리고 아픔을 만나게 되었다.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았는데 암으로 열한 살에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여덟 남매의 막내아들이면 얼마나 사랑을 받았을까?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던 아버지를 어릴 적에 떠나보내고 이제 생활전선에 뛰어든 엄마는 밤낮으로 일터에 보내고 누나들은 취업하고, 이 어린 초등학생은 낯선 도시에서 외롭고 쓸쓸하고 맘을 둘 곳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고 동네 교회에서 기타와 음악을 접하면서 음악을 하고 싶은 꿈을 꾸었다. 그런데 생활고에 힘든 어머니는 음악 하는 것을 도와줄 수 없으니 안 된다고 거절을 했다. 방황하던 청소년은 그래도 주변에 따뜻한 형과 누나, 이웃들 덕분에 마음 돌리고 공부하고 직장인이 되었고 어느 날 나를 만났단다.

내가 알고 있었던 남편에 대한 작은 이해의 조각은 ‘음악이 하고 싶었고 못했지만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불었고, 교회에서 기타를 친다’는 것이었는데 그 뒤에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한 사람의 인생이 있었다.



남편의 등짝이 밉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 대기업인 우리 회사에서도 50대 초 중반의 직원들이 희망퇴직을 했다. 나의 선배님들이고 신입사원이 되어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따르던 분들의 원하지 않는 희망퇴직에 다 같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서 삼삼오오 모여 술을 한 잔 마시면서 저녁 한 끼를 하게 되었다. 다들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재취업을 하거나 교육을 받고 계셨는데 이 어려운 시기에 그들 옆에 배우자들이 있었다. 뭘 같이 해도, 하지 않아도 그저 옆에 지지하고 의지를 할 사람과 다시 한번 인생의 고비를 통과하고 있었다. 참 다행이었다. 잘 지내고 계셔서 마음 한편에 안도와 위로가 되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 남편도 이제 오십 대가 되어 지금 누구보다도 어려운 불확실성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다. 가겟세를 내야 하는데 이번 달 영 수입이 신통치 않으니 지방으로 알바를 간다고도 했었다. 주말에 방에서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한 번씩 문을 열어 보면 낮잠을 자기도 하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하기도 하고, 일렉기타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다. 한 동안 그의 등짝이 그렇게 밉고 왜 나만 이리 고단한가 원망했는데 사실은 그도 나만큼 고단하고 싱숭생숭하겠구나 하고 그의 마음이 아주 조금 헤아려졌다.


나는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엄마는 아빠가 떠난 후에 아빠의 사랑의 크기를 헤아리게 되었다고 했다. 친정아버지가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엄마는 사는 날동안 아버지에게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고 후회했다. 더 따뜻하게 해 주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아직 내가 도착하지 않은 70대의 나와 남편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라도 남편에 대한 연민과 안쓰러움이 내게 생긴 것이 너무 다행히란 생각이 들었다. 빨래를 개서 서랍에 넣으라 방에 들어갔다가 그냥 돌아서서 나오지 않고 괜히 남편의 등을 한 번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나는 나중에 오빠랑 같이 두 손 꼭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런 노인이 될 거야… 그렇게 해 줘”


그저 활활 타오르는 불 같은 줄 알았던 사랑은 녹록지 않은 일상에 치여 고단한 사랑이 되었다가 다시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헤아리고 이해하는 사랑으로 변화되기 시작하려고 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아플 때,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비들을 함께 넘기면서 의리와 공동체 의식으로 변화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형편없는 나의 모습을 공유하는 그런 사이이기도 하다. 또한 퇴근 후 침대에 벌렁 누워 ‘사는 거 왜 이렇게 힘드냐?‘ 하고 혼자 말하면서 눈물이 또로록 흐를 때 머리를 쓸어 넘겨주면서 “다 그래… 힘들어? 힘 내” 하고 한 마디 건네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어 가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 더 깊고 다채롭고 새로운 모양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이 바로 인생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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