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를 것도 없지만 세상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만의 가정과 일 이야기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매년 이 날마다 소셜미디어 중 어느 곳에라도 글을 남기곤 했는데 올해는 좀 늦었지만 브런치에 남겨본다.
<어느 기혼 여성들의 흔한 직장 내 대화>
“상무님, 그거 아세요?”
“네? 어떤 거요?”
“상무님 처음 여기 오실 때, 직원들 사이에 “저분 낙하산이래” 하는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그래요? ㅎㅎ 억울하네. 저는 1시간 동안 세 분의 면접관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영어로 압박 면접을 통과하고 여기에 왔는데요.”
“아. 그래요? ㅎㅎ 어찌 되었든 저희 부서에 여성 리더로 오셔서 너무 좋아요. 앞으로 더욱더 승승장구하세요.”
이 고마운 날을 잊지 못한다. 사실 나는 이 전통적인 남성 중심 조직의 첫 번째 여성 임원이 되었고, 호기심과 의구심의 눈길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실력으로 이 조직에 받아들여지기를 애쓰고 있었던 터라… 이 따뜻한 격려는 바짝 긴장하고 얼었던 내 마음을 녹여 주었다.
그 이후에 나는 조직 내에 기혼 여성들과 종종 짧은 점심시간을 틈타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내가 리더니까 뭔가 직원들에게 도움이나 조언을 주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 정도로 가정생활이나 육아에서 성공하지도 않았거니와 일, 가정, 나 개인의 삶 세 가지 공을 마구 쏘아 올리며 휘청휘청 대는 저글링이 내 삶을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냥 같이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동료가 말했다.
“저는 우리 아들 두세 살 때 출장 다니고 할 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아이가 어려서 두고 가는 것도 힘들고, 몸도 힘들고 그랬어요. 제가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가 답했다.
“그거 알아요? 우리 회사 본관에 가면 유축실(아이를 낳고 아직 모유 수유를 할 때 젖을 기계로 짜서 병에 담는 곳)이 있는 거 알아요? 저는 둘째 7개월 때부터 다시 출근했는데 모유 수유 1년 하고 싶어서 3~4시간에 한 번씩 유축실에 가서 젖을 짜고 꽁꽁 얼려 집에 가서 아이에게 먹였어요. 그래도 그런 시설이 있어서 감사했죠. 저도 알아요. 차장님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묻는다.
”이제 곧 방학인데, 아이들 먹는 것은 어떻게 해요? 저는 새벽에 아침밥, 점심밥을 같이 만들어 놓고 와요. 그러면 아이들이 잘 데워 먹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익숙한데 저학년 때는 준비해 놓은 음식도 아이들이 스스로 차려 먹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
동료가 말한다.
”걱정 마요. 조금만 더 있으면 알아서 다 먹어요. 편의점에서도 사 먹고, 집에서도 먹고 싶은 거 해 먹고, 저는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니 방학이 한결 수월해졌어요. “
우리가 함께 나누는 삶의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만났을 뿐 비슷한 생애 주기를 함께 통과하는 친구이며 또래 엄마인 것이다. 이런 작은 공감은 우리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치유한다.
<여성으로서의 직장생활의 시작>
21년 전에 회사 면접 시에 남성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OO 씨는 결혼 후에 직장생활을 어떻게 할 건가요?” 결혼을 해도 일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일단 그 당시 남자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 결혼할지 아직 계획이 없고, 결혼한다고 해도 계속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회사 면접에서 하지 않을 거라 짐작된다. 결혼도 개인의 선택의 문제거니와 여성도 결혼 후에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왜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나중에 입사를 하고 알게 되었다. 영업부서에 입사를 했는데 여성 리더는 없었다. 마케팅이나 홍보팀에는 여성 팀장들이 있었지만 해외영업, 국내영업과 같은 영업부서에는 여성 리더가 없었다. 기혼여성도 많이 없었고 여성직원들은 서류를 작성하는 지원 성격의 업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내가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아버지가 그러셨다. “막상 회사에 들어가면 똑같이 공부하고 입사했어도 여직원들은 커피도 타야 하고 서무일도 해야 할 수도 있어” 겁을 주시려기 보다는 미리 마음의 대비를 하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여러 번의 낙방 끝에 취업을 했기 때문에 커피를 타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사실 커피만 탔던 것이 아니라 내 몫의 비즈니스도 주어졌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나갔다. 정수기 물이 바닥나서 큰 통을 번쩍 들어서 다 먹은 통과 교체할 때 남자 직원들이 도맡아 하거나 총무팀에 가서 부서 전체의 창립 기념일 선물을 받으러 갈 때 팀의 막내 남자 직원들이 커다란 카트를 끌고 갔던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출산과 육아의 세계로>
하지만 결혼 후 임신을 하고 첫 아이를 낳을 즈음에는 여성이자 워킹맘으로서의 고독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출산 휴가만 써야 하나?‘ ‘육아 휴직도 써도 되나?‘ ‘얼마나 쉬어야 괜찮을까?’ ’너무 오래 쉬고 오면 내 자리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인사팀에 계시는 여성 리더분이 이런 주제에 대한 멘토링을 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면담을 신청하고 얼마나 쉬는 것이 적절할지, 아이를 낳고는 막상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기는 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여쭤보았다. 정작 결정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지만 잠시나마 나보다 선배인 여성 리더의 경험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둠 속에 빛을 한 줄기 찾은 느낌이었다.
이후에 나는 두 아이를 낳고 각각 6개월씩 쉬었다. 3개월의 출산 휴가와 3개월의 휴직을 했다. 만약 내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계약직 사원이라도 충원이 가능했다면 더 쉬었을 텐데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동료 남자 직원들에게 내가 하던 일을 조금씩 나눠주고 미안하다, 고맙다 점심을 사면서 휴가에 들어갔다. 그러니 더 길게 휴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첫째 아이의 육아 휴직을 마치고는 아이를 1시간 거리에 사시는 친정 부모님 댁에 맡기고 만 세 살이 될 때까지 주말마다 아이와 만났다. 야근이 많았던 당시 업무 성격 때문에 7개월 된 아이를 온종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싶지 않아서 친정에 맡겼다. 친정 부모님이 아이를 정성으로 키워 주셨지만 주말마다 아이를 두고 오면서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맨날 울었다. 아이도 말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는 ”엄마 가지 마 “ 하는데도 ”엄마, 다음 주에 올게 “ 하면서 눈물의 이별을 하곤 했다.
이렇게 눈물 많은 3년의 경험을 한 후에 둘째 아이는 과감하게 7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다. 대신 시터 이모님을 구해서 오후 4시면 아이를 하원시키고 큰 아이와 함께 내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봐주시도록 했다. 이러나저러나 그 시기는 힘들었지만 아이를 같은 집에서 키우니 남편의 육아 참여도 늘고 아이와 애착도 잘 생겨서 나중의 선택이 나았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쳐 학교를 보내고, 방과 후와 방학에 다양한 노력으로 아이들을 길러낸 이야기, 육아를 넘어 퇴근 후 자녀들의 학습 멘토를 하는 일 등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여성이 출산 후 겪게 되는 큰 변화는 내 생애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급격한 것이었고,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할 수 있는가 수없이 고민해야 했다. 그 수많은 밤을 보나고도 아직 일과 가정의 양립을 이어가고 있는 내 자신이 지금은 무척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조금씩, 서서히 그러나 돌아보니 큰 변화들>
한 여성으로서 직장생활의 20여 년의 여정을 돌아보니 알게 모르게 변화가 많이 있었다. 이것은 일반화할 수 없는 내 개인의 경험과 친구들을 통한 타기업에 대한 간접경험을 포함한다.
먼저 출산 휴가, 육아 휴직에 대한 사용이 보다 활발해졌고 이로 인해 결혼 후 여성들이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남성의 휴직과 육아와 가사 참여가 활발해졌다. , 여성의 육아 휴직 기간도 늘고 유연성이 생겨나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에 남겨두었던 휴직을 나눠서 사용하기도 한다. 17년 전과 12년 전에도 나에게 출산 휴가나 휴직을 쓰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보다는 용기를 더 필요로 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과, 회사 경영진의 의지, 이 제도를 용기 내어 쓰기 시작한 소수의 사람들의 행동을 만나 시너지를 내며 잘 정착해 가는 듯하다.
때로는 개인들의 지치지 않는 끈질긴 요구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회사를 비롯해서 많은 기업들이 직원을 위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에도 현재 회사 근처에 단독 건물을 가지고 전문성을 갖춘 보육 위탁 기관의 도움을 받아 직원 자녀들에게 양질의 보육을 제공하고 있다. 지금 어린 자녀를 회사 어린이집에 보내는 후배들의 만족도는 높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거 내가 많이 건의해서 생긴 거예요.” 하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사실 임신했을 때부터, 첫째 아이, 둘째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회사에서 리더십과의 대화 자리가 있을 때마다 “사내 어린이집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로도 글로도 참 건의를 많이 했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간곡히 함께 요청을 했다. 비록 우리 아이들은 누리지 못했지만 후배들이 이런 변화의 결과물을 누리고 있어서 뿌듯하다.
우리가 어떤 조직에서 다수가 아닌 소수의 그룹에 속해 있을 때에 우리의 의견을 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꾸준히 될 때까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나중에 올 큰 변화를 위해 선제되어야 하는 소중한 행동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회사 내에 있는 다양한 제도들을 실제로 써 보고 좋은 점들은 후배들과 동료들에게 알려주고 전파하는 전도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린이집 등원 후에 출근해 보려고 9시~6시로 근무시간을 변경하는 제도를 사용해 보았다.(우리 회사는 원래 8시~5시에 근무를 한다). 이보다 앞서서는 임신 중 단축근무도 사용해 보았다.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마련된 제도인 상담제도도 이용해 보았다. 두 아이 육아로 지쳤던 나를 위해서 이용했으나 나중에 자녀들의 심리검사나 상담도 제공한 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남편과 나의 양육태도에 대한 상담, 아이들 심리 상담 등을 맘껏 사용해 보고 동료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한 번은 아이를 출산하고 우울감이 찾아온 아내를 걱정하는 남자 동료에게 아내를 위해서 회사의 상담 제도를 사용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어떤 제도는 나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제도가 사라질까 봐 작은 사명감에 도전해 보기도 하였다.
변화는 시대적 상황과 만나 증폭되고 가속화되기도 한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필연적으로 재택근무를 시험해 보게 되었다. 회사의 경영자나 직원에게나 모험적인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간섭과 통제가 없어도 과연 업무가 이루어질까? 긴가 민가 의심으로 시작된 이 재택근무 기간에 어떤 직원들은 보란 듯이 회사를 기만하고 근무를 태만하여 지적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맡은 바 책임과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 상호 간 신뢰를 구축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가치관의 변화도 생겼다. 몸이 아플 때 끙끙거리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자신의 빠른 회복과 동료들의 건강을 위해서 집에서 머무는 것이 더 나은 배려라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또한 본인의 건강뿐 아니라 가족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 적어도 우리 직장에서는 아이가 아프면 양해를 구하고 당당히 재택근무를 할 수 있다.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는데 출근은 해야 하고 어린이집도 보낼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시절을 나는 겪었지만 우리 직원이 내게 아이가 아파 출근을 못하겠다고 하면 걱정 말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배려한 만큼 직원 스스로 업무 시간을 조정하고 장소를 바꿔도 업무의 기한을 준수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상호 신뢰와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라는 한 여성의 역할>
조직의 제도와 문화가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도록, 개인의 다양성(생활주기, 현재에 처한 상황 등)을 배려하도록 조금씩 유연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여성들과, 이들의 가족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각 조직의 리더의 주도적 변화도 있었겠으나 용기 있는 개인(흩어져 있어 소수처럼 보이는)들의 선택과 행동을 만나 더욱 시너지를 내지 않았나 싶다.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여성들이 때로는 고독하지만 소신껏 각자의 역할을 감당해 주었고, 그 존재감만으로도 우리 세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도 때로는 고단하나 숭고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묵묵히 감당하며 그러나 용기 있게 개인으로서의 일과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각자 또한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내게 승승장구하라고 했던 동료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여성 직원들과 나에게 앞에 다른 여성들이 없었던 부서에도 가고 안 해본 일도 도전해 보자고 격려하고 ”우리도 유리천장을 뚫어볼까요? “ 하면서 힘을 북돋운다. 높이 올라가는 것이 능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앞에 없고 본보기가 없기 때문에 꿈을 꾸지 못하거나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좌절해 주저앉고 싶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여기서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그저 배려만 받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남성 여성을 잠시 잊고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프로페셔널 한 일터에서 실력만으로 승부를 내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고 날마다 성장하고자 애를 써야 한다. 혹여 자녀를 돌보고 밥을 짓는 일이 우리를 조금은 더 고단하게 할지라도 자신을 향한 믿음과 꿈꾸는 내일을 위한 열정은 우리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기에 일터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기 위한 내적 목표를 향한 열심도 양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여성으로, 엄마로, 직장의 리더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일과 가정에 있어서 매 순간 책임 있고 용기 있는 선택과 행동을 이어가려 다짐한다. 동네와 일터와 가정에서 이 시대를 함께 사는 모든 여성들을 격려하고 그런 여성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돕고 연대하는 모든 남성들에게도 감사하면서 말이다. 비록 거창할 것 없는 한 여성으로서의 개인의 삶일지라도 나의 삶도 누군가를 세우고 위로하고 타인을 위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의미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