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야

비로소 알게 된 아버지의 마음


"엄마가 우리 딸 대신 아파주면 좋겠다."


딸아이가 생리를 시작했다. 알싸하니 한 이틀은 꼬박 아팠던 그 첫 경험을 알기에, 온종일 침대 밖을 나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찜질용 온수팩에 뜨거운 물을 채워 가져다주며 내가 말했다.


"엄마, 너무 감동적인데..." 하고 아이가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거 아니네. 견딜 만해."


그래도 엄마인 나는 아이가 안쓰럽고, 마음이 뭐라 말하기 어렵고 복잡했다. 그러다가 몇 개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다.


#1

1995년에 수능시험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해보니 난이도가 높았고 긴장했던 탓에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고생했던 초중고 시절의 마감이 성에 차지 않고 서러웠던 그날, 나는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긴긴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뒤척이고 있었다. 열린 방문틈으로 빛이 들어왔고, 저 멀리 어렴풋이 식탁에 앉아 소주 한 잔을 기울이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시험을 망쳤는데 우리 아버지가 왜 저러고 있어?' 하고 그때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2

2000년 8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경로를 이탈했었다. 의도적으로 빨리 가는 경로에서 벗어나서 카자흐스탄의 기독교 비영리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2년 정도 일을 했는데 스물다섯, 여섯이었으니 참 어렸고 용감했었다. 그때 그런 도전을 아버지는 허락해 주셨다. 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우리 딸이 소련으로 공부하러 갔다?”라고 둘러대셨다고 했다. 내 생애 첫 집을 떠나는 경험이며, 한국을 떠나는 두렵고 떨리는 모험이었다. 나만 그렇지 않았을 테지. 아버지 마음도 복잡했겠지. 출국하기 며칠 전에 아버지가 그 나라 가서 쓰라고 내 생애 첫 노트북을 사주셨다. 지금이야 중학교부터 나라에서 보급을 (인천시 교육청은 그렇다) 해 주는 흔한 물건이지만 당시에는 노트북 컴퓨터를 가진 또래는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손수 가서 “우리 딸이 외국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쓸만한 노트북을 추천해 주세요.” 하고 사다 주셨을 거다. 그렇게 나는 출국을 했고, 일 년쯤 지난 후에 아버지가 한 번 오셨다. 우리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도시의 관광지도 함께 둘러보고, 장거리 택시를 대절해서 국경을 넘어 키르기즈스탄의 이스쿨이라는 호수에 가서 머물기도 하며 여행을 했었다. 그리고 며칠 더 계시다가 일주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부모님을 배웅해 드린 후 발걸음을 돌려 아파트에 돌아온 후 아직 부모님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눈물을 훔쳤다. 아마 아버지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시면서 마음으로 우셨을 거다.


#3

몇 년 후 2004년, 나는 스물여덟의 나이로 일반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엄청 쓰면서 구직활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공백기가 길기도 했고 구직 활동은 순탄치가 않았다. 면접까지 가지도 못하기가 부지기수였고, 면접에 가서도 여러 번 떨어졌다. 어느 날은 눈높이를 많이 낮춰 어느 가방 공장의 해외영업 자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오래 일할 것 같지 않다고 해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다이어리에 번호를 매겨가며 이력서를 쓴 것이 100번이 넘어가니까 나는 세상에서 영원히 패배자로 남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겠다고 발걸음을 떼어 중앙아시아 국가로 떠났던 젊은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무모한 선택을 자책하며 나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괴로워했다. 어느 날 너무 괴로워서 아침부터 또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나에게 말을 거셨다. "학원을 해보는 건 어때?" 나는 수학을 전공했고 과외를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학원을 열어 원장 겸 강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원하는 취직이 안 되니까 그런 차선은 싫었다. 그래서 나는 더 깊이 돌아누우며 학원을 여는 것은 싫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한참 적막이 흘렀고, 고요와 어둠이 집을 덮칠 듯했던 그 절망의 날 오후, 너무 속상했던 그날에 나는 한 회사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다. 그 회사는 현재 나의 일터이다. 그렇게 내가 괴로운 시절을 보낼 때마다 옆에서 안쓰럽게 바라보던 아버지, 기도하던 어머니가 있었고, 내가 구직에 성공해 아버지의 고향인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해 준 아버지가 계셨다.


#4

나는 삼 남매의 장녀인데 우리는 나이 터울이 적어서 셋이 같이 대학생이었던 적이 있었다. 4학년, 2학년, 1학년. 지금 생각하니 우리 아버지는 그 학비를 다 감당하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싶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직장생활은 고돼 보였다. 승진철에는 승진이 되지 않으면 집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마음을 달래시는 모습도 보았고, 조직개편으로 인해서 대기 발령을 받아 현장의 소장으로 근무해야 하는데 본사에 출근해야 했던 시절에도 비록 소주를 자주 드셨지만 자식 셋을 대학에 보내고 키우기 위해서 견디고 견디셨던 것 같다. 회식을 하셨던 맛있는 식당은 주말에 한 번씩 우리들을 데리고 가셨다. 주로 매운탕이나 회, 게 이런 종류의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식당을 나와 바다가 보이는 너른 들판 같은 데서 동생들과 놀고 있으면 아버지는 근처 현장에 가서 일을 다시 하고 돌아오시곤 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잘 헤아리지 못했던, 미처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내가 자녀를 키우고, 내가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에 미치고 또는 넘어가면서 점점 더 또렷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자녀인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를 이제는 조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소녀로 자라가면서 앞으로 내가 통과했던 문턱들, 어른이 되려면, 삶의 깊이와 풍성함을 맛보려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그런 아픔과 성장의 시간들을 걸어 들어갈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나 또한 하나씩 경험해 간다. 덕분에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나의 아버지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느끼게 되는 이 오묘한 삶이란 형언하기가 어렵다. 이 아린 마음, 나를 사랑했던 아버지가 겪었을 그 아린 마음이 고스란히 내 마음에 전해진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내 마음을 쓸어내려야 할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마터면 아버지의 사랑을 반쪽밖에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이제라도 알아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가끔 같은 꿈을 꾼다. 어릴 적 기억인데 잊히지 않고 계속 더 또렷해지고 꿈에 나온다. 아버지는 뉴스나 드라마를 보고 계셨고, 그 옆에서 놀다가 소파에서 잠이 든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번쩍 안아서 방으로 옮겨 뉘어 주셨다. 잠이 살짝 깬 것도 같은데, 아버지가 안아주었던 그 느낌이 좋았나 보다. 그 느낌, 촉감, 빛과 어둠이 기억이 난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딸이었나 보다. 이러한 기억들과 사랑의 조각들은 아주 강력한 힘이 되어 지속된다. 지금은 세상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열아홉, 스물넷, 스물여덟의 내 곁에서 나를 안쓰러워하고 염려하고 곁에 있어 준 아버지는 지금도 내가 일터에서, 일상에서, 부모의 자리에 있을 때, 고단하고 막막할 때 내 곁에 머물러 나를 지지하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 같은 소심쟁이가 이렇게 의연히 오늘을 살아갈 리가 없다.


감사하다. 아버지의 사랑이 여전히 내 안에, 내 밖에, 내 곁에 머물러 있음에. 나도 우리 딸이 평생 원동력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과 지지, 그리고 안쓰러움의 마음으로 이 아이의 삶을 응원하기로 결심해 본다.


다시 딸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아빠랑 오빠에게 우리 딸에게 생긴 변화를 이야기해 주고, 함께 축하해주고 싶은데 괜찮겠어?” 딸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에게 가서 케이크를 사다 달라 부탁했다. 큰아들에게도 동생의 신체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배려와 격려를 당부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 후 온 가족이 딸아이를 축하해 주었다. 정작 딸아이는 웃는 둥 마는 둥 새초롬했지만, 딸아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아버지, 남편은 길고 감격스러운 소감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평소 출근이 이른 나 대신, 태어난 지 7개월 차부터 자신의 점퍼 속에 쏙 넣어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켜 주었던 소중한 기억부터 소환했다. 아이가 여섯 살 즈음에 내가 대학원 다닌다고 서울로 공부하러 가면 아이를 하원시켜 씻기고 저녁 먹이고 재우던 기억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했다. 남편이 그렇게 한참을, 딸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감격스러운 소감을 마친 후 물었다. “우리 딸도 한마디 할래?”“아니. 나 할 말 없어.”사춘기 소녀는 아무 말하지 않았고, 케이크를 나눠 한 조각씩 먹으며 파티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나는 알 것 같다. 우리 딸도 내 나이가 되면 나의 사랑을 헤아릴 거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 딸이 또 엄마가 되어 자신의 자녀를 키우면서 오늘의 추억을 떠올릴 거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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