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내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고 하면, 아마 내가 아주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시크한 소녀일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 실제로 우리 스케이트보드파크에는 그런 애들이 많이 있다. 헬멧만 쓰고, 다른 보호대 없이 힙합 바지에 루즈한 티셔츠를 입은 또래 아이들과 언니, 오빠들이 많이 있다. 개성이 넘치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도 많다. 파마를 해서 곱실거리는 긴 머리를 헐렁하게 묶은 남자아이도 있고, 머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땋아서 외국에서 본 듯한 스타일을 한 여자아이도 있다.
하지만 나는 주로 검은색 운동복 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간다. 그리고 ‘안전, 안전’ 노래를 하는 엄마 때문에 헬멧뿐만 아니라 무릎과 팔꿈치, 손 보호대까지 모두 차야 한다. 게다가 나는 안경을 쓰고 있다. 헬멧을 쓰고 안경까지 쓰고 운동을 하다 보면 귀 뒤가 조금 쓸리기도 한다. 그러니 모든 장비를 하고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그리 힙하지가 않다
스케이트보드파크에 가면 보통은 선생님이 새로운 동작을 보여주고, 원리를 설명해 주시면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내가 이해했음을 표현하면 된다. 사실 스케이트보드파크는 힙합 음악이 크게 흐르고, 사람들의 스케이트보드 바퀴가 나무 바닥을 달리는 소리, 쇠로 만든 레일에 보드의 바퀴가 ‘챙’ 하고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다양한 말소리가 뒤섞여 옆 사람과 말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시끄럽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 서로 얼굴과 입모양을 보고 이해하고, 보디랭귀지를 사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청 시끄러운 곳에서 나는 조용히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내 시간을 즐긴다. 그런데 가끔 내가 새로운 기술을 성공할 때, 엄마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아주 큰 소리로 말한다. “대박, 우리 딸 최고! 대단해!” 나는 눈을 찌푸리고 얼른 엄마의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며 “엄마, 제발 작게 말해 줄래?” 하고 엄마를 제지한다. 엄마는 “어때? 왜 그래? 잘 들리지도 않아. 괜찮아.” 하면서 “남의 신경을 왜 써?” 하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신경이 쓰인다.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 가장 곤란한 순간은 선생님이 내 의견을 물어볼 때다. 그럴 때면 나는 말문이 막히고 눈만 깜빡깜빡하면서 선생님을 쳐다보다가 또 엄마를 쳐다본다. 그러는 사이 잠시 침묵이 흐르면 엄마나 선생님이 질문을 바꿔서 묻는다. “은율이, 이게 더 좋다는 거지?” 그러면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어서 예나 아니오를 대답한다.
왜 나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어려울까?
엄마도 여러 번 물어보고, 사람들도 물어봐서 나도 한 번 생각을 해 봤다. 생각해 보니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 보면 이미 대답할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어떤 게 제일 좋은 답일지 생각하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한데, 묻는 사람들은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 그 사이에 상황은 이미 지나가 버리기 일쑤다.
나는 오빠가 한 명 있다. 이름은 최은호. 고등학교 2학년. 은호 오빠는 나랑 정반대이다. 목청이 아주 우렁차고, 말이 너무 많다. 질문도 많다. 엄마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은호 오빠의 질문에 대답해 주느라 아주 바빴다. 사춘기가 되면 말수가 줄어든다는데, 우리 오빠는 아직도 식사 시간에 침을 튀기며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한다. 가끔 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오빠가 하는 이야기 관련한 내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해도 내 목소리는 오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묻히곤 한다. 나는 오빠보다 더 크게 이야기해 보려고 배에 힘을 빡 주고 노력해 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밥을 먹다 말고 화가 나서 “왜 내 말은 다 무시하는 거야?” 하며 울기도 했다.
내 인생 최악의 경험은 코로나 때 했던 줌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이름을 부르고 질문을 하셨는데, 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그만 얼음이 되어버렸다. 너무 당황해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버렸다. 오빠도 코로나 때 줌 수업을 했는데, 오빠는 그때도 거침없이 말을 했다. 수업을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 저 이해 못했어요.” 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키즈카페에서 오빠가 미끄럼틀도 태워주고 자상하게 놀아줬다는데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오빠는 너무 까칠해서 별로이지만, 언제나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은호 오빠의 성격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다행히 코로나가 끝나고 학교 수업에서는 원하는 사람이 손을 들고 대답하면 되니까 나는 답을 안 해도 괜찮다.
엄마 말로는 내가 이렇게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치원 때 하도 말을 안 해서 선생님이 엄마를 불러 “은율이가 말을 할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혹시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는데 우리 엄마는 “은율이는 집에서 필요한 말을 다 하고 엄마, 아빠, 오빠랑도 잘 지내요.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대답하셨단다. 이럴 때는 좀 쿨한 우리 엄마.
그렇다고 말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다. 5학년부터 친구들과 아이돌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생겼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면서 각자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를 나눈다. 5학년 때 내 단짝이었던 효은이와 나는 둘 다 ‘모아(MOA)’라는 점 때문에 학기 초부터 친구가 되었다. 모아(MOA)는 남자 아이돌 투모로우바이투게더(TOMORROW X TOGETHER)의 팬(fan) 이름인 팬덤명(fandom name)이다. 하지만 모두 말을 잘하고 끊임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그냥 듣고만 있어도 좋을 때가 많다. 또 친구들은 학원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으니 그냥 듣는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의 말을 주로 들어준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은 친구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어보는 친구도 없고, 다른 친구들이 방과 후 하는 활동과 달라서 얼마나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엄마는 조금 다르다.
엄마는 맨날 다니는 똑같은 학교에 대해서 처음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 딸, 오늘 특별한 일 없었어? 재미있는 일 없었어?”
엄마도 학교 다녀봤으면서 왜 매번 묻는 걸까? 엄마는 회사 일이 맨날 힘들다고 하면서, 왜 내 학교생활이 늘 재미있기를 기대하는 걸까? 그래서 엄마가 물어보면 “딱히 재미있는 것 없어. 똑같았어.” 이렇게 답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질문을 바꿨다.
“우리 딸,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 맘에 들었던 일 한 가지, 맘에 들지 않았던 일 한 가지를 말해 줄 수 있어?”
이 질문은 이상하게 내가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매일 똑같은 학교생활인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꼭 한 가지 정도는 맘에 드는 일도 있고, 한 가지 정도는 맘에 들지 않는 일도 있었다. 엄마의 질문이 신기하게 통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담임 선생님이 반 전체 학생들에게 핫도그를 사주신 일은 좀 맘에 들었어. 그렇지만 하루 종일 전담시간이라서 (영어, 과학, 도덕, 체육처럼 우리 반이 아닌 다른 학습실에 가서 수업을 하는 것) 그건 좀 맘에 들지 않았어.”
그랬더니 엄마가 또 물었다.
“전담수업은 왜 싫었는데?”
“전담수업 때 돌아다니는 교실마다 온도가 다 달라서 싫었어. 과학교실은 따뜻했지만, 영어교실은 추웠거든.”
이상하게도 엄마는 내가 말을 하게 한다. 엄마와 여행을 갔을 때도, 엄마랑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가는 길에도 엄마의 질문에는 답을 잘하는 것 같다. 엄마랑 말을 잘하는 것을 보니 나는 정상인 것 같다. 나도 말을 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