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 대로 살아도 된다고
“은율아, 엄마 마트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럴까? 나도 뭐 사줄 수 있어?”
“응, 뭐?.”
“요즘 홈런볼이 소금 우유맛으로 새로 나왔더라고.”
“엄마, 내가 홈런볼 좋아하는 거 알지? 홈런볼은 모든 맛이 다 각각 맛있단 말이야”
“그래, 물론이지.”
엄마와 은율이는 마트로 향했다.
“은율아, 엄마가 손 잡아도 될까?”
“음… 잠시 생각해 볼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요즘 은율이는 엄마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았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뽀뽀도 잘하고 손잡고 다정하게 지내던 딸의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은율이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손을 잡아도 될지 살며시 물어본 것이다.
잠시 후, 은율이가 엄마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오늘은 엄마랑 소금 우유맛 홈런볼도 먹으러 가는 길이니 엄마 손 좀 잡아 주지, 뭐.”
9월의 하늘은 높았다. 하얀 솜털 구름이 둥둥 떠 있었고, 그 아래 길 양쪽의 아름드리나무가 가지와 잎을 맞대어 둥근 아치를 만들었다. 그 아치 모양의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날 때,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얇고 반짝이는 햇살이 엄마와 은율이의 얼굴에 닿았다 사라졌다 했다.
“은율아, 엄마는 이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앤이 친구 다이애나와 학교 가던 숲길을 함께 걷는 것 같아. 지금 엄마가 앤, 은율이는 다이애나 같아. 우리 아파트가 오래되어 낡긴 했지만, 이런 나무들이 있다는 건 행운이야.” 엄마는 동화 속에 빠진 소녀처럼 말했다. 하지만 은율이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이사라는 것도 한 번 해 보고 싶고 더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웬일인지 하나같이 넓고 새 아파트를 보게 되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엄마와 은율이는 마트에 도착했다. 엄마가 먼저 채소와 생선, 고기를 사는 사이 은율이는 과자 코너를 둘러보고, 중간에 라면 코너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과자 진열대에는 소금 우유맛 홈런볼 말고도 새로운 과자들이 많아서 은율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금 우유맛 홈런볼 외에 한두 개 더 가져가도, 엄마는 “한꺼번에 다 먹지 않기로 약속해.” 하며 모두 계산해 줄 거라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과자를 양쪽 팔을 모아 바구니를 만들어 담으며 기분 좋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은이? 예은이? 누구지?‘
그런데 은율이는 갑자기 과자를 진열대에 도로 내려놓고 허둥지둥 통로를 찾았다. ‘어디가 출구지? 아, 모르겠다.‘ 일단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자가 있는 통로를 나와 모퉁이를 돌자마자 반대편에서 예은이가 아빠와 함께 카트를 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예은이는 은율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은율이는 뒤를 돌아 황급히 오던 방향으로 걸어가며 예은이로부터 멀어졌고, 입구를 찾아 마트 밖으로 나왔다. 마트 앞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나서 은율이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보니까 손에 들었던 과자도 하나 사 오지 못하고 왔다는 걸 발견했다. 속상한 마음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화면에 은율이 얼굴이 비쳤다. 허둥지둥 나오면서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볼에 붙은 모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카락을 떼어 귀 뒤로 넘기니, 이내 불어온 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식혀 주었다.
웅—웅.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엄마’라고 떴다.
“여보세요? 엄마, 미안해.”
“왜? 무슨 일이야? 엄마 지금 라면 코너인데, 은율이가 안 보여서. 어디야? 아직도 과자 코너야?”
“아니, 나 일이 생겨서 먼저 나왔어. 엄마,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미안한데 홈런볼 소금 우유맛 한 묶음만 사다 줄 수 있어? 나 정신없어서 그냥 나왔어.”
“그래? 무슨 일이지? 금방 사 가지고 나갈게. 걱정 말고 기다려.”
엄마는 정말 얼마 안 되어 장을 다 보고, 내 과자도 잊지 않고 나왔다. 엄마 장바구니가 무거워 보여 은율이는 엄마 장바구니에서 열여섯 개들이 도시락김 한 세트와 라면 한 묶음을 꺼내 양팔로 안았다. 부피만 크고 가벼워서 엄마에게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은율이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엄마는 아침 8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출근 전에 우리 가족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 놓고 가느라 언제나 새벽에 일어난다. 은율이는 아침을 잘 먹지 않지만 은호 오빠는 워낙 먹성이 좋고 쌀밥을 좋아해서, 아침에도 꼭 밥과 여러 반찬을 늘어놓고 먹었다. 오빠는 엄마를 번거롭게 하는 것 같은데 엄마는 그런 오빠가 밥을 잘 먹어서 좋다고 했다.
아빠는 은율이의 둘도 없는 친구다. 은율이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엄마의 출근 시간이 빨라서 아침에는 아빠 손을 잡고 어린이집, 유치원을 등원했고, 엄마가 야근을 하면 아빠랑 밥 먹고 씻고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가 부탁하면 언제든 설거지도 빨래도 도왔다. 엄마가 예약한 은율이 병원 진료도 엄마가 바쁘면 아빠가 데려가 주었다. 그래도 엄마는 늘 지쳐 있고 바빠 보였다. 엄마 말로는 집에는 보이지 않는, 표가 잘 나지 않는 집안일 더 많다고 했다.
엄마는 드라마를 보면서 빨래를 개다가도 은율이와 눈이 마주치면 손하트를 날려주었다. 잠자기 전 책을 읽어 주다 너무 졸려 책이 손에서 툭 떨어져도, 밤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동화책을 읽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 엄마를 사랑하는 은율이는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딸이 되고 싶었다.
엄마는 장바구니를 들고, 은율이는 김과 라면을 들고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은율이가 먼저 입을 뗐다.
“나 아까 별로 안 친한 반 친구를 마트에서 봤어. 그런데 이상하게 겁이 나고, 마주치고 싶지가 않더라고. 혹시 말이라도 걸면 어색할 것 같고… 그래서 갑자기 도망쳤어.”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엄마도 안 받고 싶은 전화는 일부러 안 받을 때도 있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일부러 피할 때도 있어. 괜찮아.”
“근데 엄마, 나 예은이가 싫은 건 절대 아니야.”
“그래? 그럼 왜 그랬을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마,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되면 좀 당황하는 것 같아. 미리 약속하고 만나거나,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조금 생각하고 가면 한결 편안한 것 같아.”
“그래? 그럴 수 있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달라. 생김새도, 성격도,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그러니 은율이가 스스로를 잘 알아가고,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야. 다만 세상엔 은율이와 다른 사람이 많아.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친구들도 다 달라. 혹시 다른 사람들이 은율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은율이도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을 거야. 더 크면서 알게 될 거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를 존중해 줄 수는 있어. 엄마도 잘 안 되지만 연습 중이야.”
은율이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듯 말 듯 아리송했다.
그날 저녁, 잠을 자려고 누우니 마트에서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마트, 과자 코너 진열대 앞.
“예은이?”
은율이가 예은이의 목소리를 듣고 과자 코너 통로를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손에는 홈런볼 소금 우유맛 한 봉지가 들려 있다. 아빠와 함께 은율이 쪽으로 걸어오는 예은이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은율이가 예은이를 마주 보고 다가가며 이름을 부른다.
“예은아, 안녕?”
“은율아, 안녕? 와, 우리 어떻게 같은 시간에 마트에 왔지?”
“그러게.”
“아, 은율아 우리 아빠. 아빠, 우리 반 친구 은율이.”
예은이가 은율이와 아빠를 서로에게 소개한다. 은율이는 코를 타고 내려와 있는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꾸벅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예은이 같은 반 친구 최은율이에요.”
“그래? 똑똑하게 생겼구나. 혼자 왔니?”
“아니요. 엄마랑 왔는데, 엄마는 채소를 사러 가셨어요.”
은율이가 손에 들고 있는 과자를 보고 예은이가 묻는다.
“이거 뭐야? 포장지가 못 보던 모양인데?”
“이거 다른 친구가 줘서 몇 개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 새로 나온 소금 우유 맛이야. 너도 홈런볼 좋아하면 한번 시도해 봐.”
“그래야겠다.”
그때 은율이 주머니 속 전화가 진동했다.
“예은아, 나 가야겠어. 엄마가 전화하나 봐.”
“응, 은율아.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주말 잘 보내.”
은율이가 침대에 누워 혼자 씨익 웃고 있다.
“은율아, 엄마 불 끈다. 잘 자!” 갑작스러운 엄마의 목소리에 은율이의 즐거운 상상이 끝이 났다
.
‘이건 영 나답지가 않은데…’ 은율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에 마트에서 예은이를 만나면, 오늘과는 다른 모습일 지도 몰라. 아무렴 어때? 엄마가 생긴 대로 살아도 된다고 했는걸!’
아암~하암. 연거푸 하품을 하던 은율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