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떠나고, 김지수 선생님이 왔다.

열 살 평생에도 예외 없는 만남과 헤어짐

4년 전, 2021년 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왜 이렇게 학교를 일찍 가니? 이제 8시 조금 넘었는데.”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서는 은율이에게 아빠가 물었다.
“나 지호를 아침에 뱀놀이터 앞에서 만나서 학교 같이 가기로 해서 얼른 가야 해.”
찰칵.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학교 6학년인 은호는 아직 밥을 먹고 있는데, 이제 2학년인 은율이는 헐레벌떡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빠는 베란다로 나가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13층에서 내려다보면 은율이가 아파트 1층 현관을 나서 뱀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정문을 나서는 모습까지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뱀놀이터’라고 부르는 놀이터는 111~114동 네 개 동이 원처럼 둥글게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3층까지 그물과 얼기설기한 철봉 같은 것으로 연결된 높은 타원형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1층까지 내려오게 만든 동선이 뱀처럼 구부러져 있어, 아이들은 그 미끄럼틀을 ‘뱀놀이터’라고 불렀다.


아빠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손에 들고 베란다의 캠핑용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1층 현관을 나선 은율이가 뱀놀이터의 미끄럼틀까지 뛰었다. 거리는 50m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아직 키가 작고 마른 은율이의 가방이 유난히 크게 보였고 가방이 등에서 심하게 요동치며 은율이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은율이가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파트 정문 쪽에서 지호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호는 옆 단지에 살아 다른 길로 직접 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은율이와 함께 등교하려고 굳이 은율이네 아파트를 가로질러 더 멀리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어제도 봤을 텐데 뭐가 그리 반가운지,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천천히 놀이터를 향해 걸어오는 지호를 은율이가 맞으러 나가기 시작했다. 길 한복판에서 만난 두 아이는 잠시 서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정답게 나란히 걸어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아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은율이와 지호가 아파트 후문을 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캠핑용 탁자에 내려놓았다. 코로나로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해 답답한 아이들에게 캠핑 기분을 내주겠다며 베란다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카카오톡을 열어 ‘마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늘’은 은율이 엄마를 다정하게 부르는, 은율이 아빠만의 호칭이었고 ‘마누라’에서 유래했다.


“은율이 학교 잘 갔다. 마누라도 오늘 회사에서 하루 잘 보내. 은율이는 요즘 지호가 있어 한층 밝아진 것 같아. 학교 가는 길이 아주 즐거워 보이네. 8시부터 나갔어.”


은율이는 1학년 때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자주 등원하지 못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시작한 학교생활이 갑자기 온 세상을 바꿔 놓은 코로나로 인해 크게 달라졌다. 놀듯 공부하듯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활을 익히고 새 친구도 사귀어야 하는데, 난생처음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한 달에 몇 번만 등교했다. 학교에 가도 친구들과 손을 잡으면 안 되고, 마스크를 써야 했고,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반 전체가 서로를 경계하며 조심해야 했던 1년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2학년이 되어 드디어 매일 학교에 가게 되었지만 기대와 달리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은율이는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영 어려웠다. 사실 2학년 첫날부터 은율이 마음속에는 한 친구가 들어왔다. 바로 김지호. 지호는 시력이 좋지 않아 아주 두꺼운 안경을 썼는데, 그 안경을 쓴 지호는 유난히 총명해 보였다. 항상 웃는 얼굴에 첫날부터 수업 시간 발표도 잘하고 적극적인 친구였다. 그런 지호와 친해지고 싶어 한 아이들이 많았고, 학기 시작 2주 만에 치른 반장 선거에서 지호는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은율이도 지호가 좋았다. 한쪽 눈의 시력이 많이 좋지 않은 은율이는 한쪽만 돋보기처럼 두꺼운 렌즈가 들어 있는 안경을 썼고, 거울을 보며 ‘이 못난 안경 때문에 내가 더 못생겨 보이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자신처럼 두꺼운 안경을 썼지만 하나도 미워 보이지 않고 친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지호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호가 나 같은 애한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어. 지호가 내 차지가 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런 꿈은 꾸지도 말자.‘ 하며 미리 포기했다.


그런데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학교 교문 앞에서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는 지호와 우연히 마주쳤다. 말은 해 보지 않았지만 같은 반이니까, 살짝 웃는 듯 마는 듯 눈을 마주쳤다가 얼른 피하는 은율이에게 지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은율아, 안녕? 너 오늘 일찍 왔구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은율이는 “어… 어…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사실 지호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뭐라고 말할지 몰랐다. 한편 은율이가 일찍 가는 이유는, 친구들이 많이 가는 시간을 피해 한적하게 천천히 학교에 가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지만 그런 속사정을 일일이 말하기에는 아직 어색했다.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안경을 쓴 두 아이의 렌즈가 뿌옇게 김이 서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안경은 뿌옇지,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지—엉망진창 정신없는 두 아이는 동시에 안경을 선글라스처럼 젖혀 머리에 걸쳤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봤다. 약속한 듯 같은 모습을 한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더니, 갑자기 지호가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고, 은율이도 어쩐지 작은 비밀이 하나 생긴 듯한 안도감과 편안함에 씩 웃었다.


“이제부터 친구 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로 둘은 자연스럽게 같이 놀고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 마치고 학원에 가기 전 운동장에서 놀기도 하고, 토요일에 놀이터에서 만나 놀기도 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방학에도 자주 만났다. 아직 저학년이라 부모님이 먼 동네까지 가는 것은 허락해 주지 않았지만, 서로 마주 보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두 아이가 아파트 상가에서 만나 떡볶이와 쿨피스를 먹는 일은 작은 기쁨이었다.


개학을 사흘 앞둔 어느 날, 지호가 은율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은율이는 아직 휴대폰이 없어서 지호와 엄마의 번호를 공유하고 있었다.

“은율이 어머니, 저 지호예요. 은율이 있나요?” 다급하고 상기된 목소리였다.
“그래, 지호야. 무슨 일이야? 오늘도 너희 같이 놀지 않았니? 은율이 지금 씻고 있어. 금방 전화하라고 할게.”
“네, 바로 전화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래.”


씻고 나온 은율이가 냉장고를 열어 수박 한 덩어리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은율아, 지호가 무슨 일이 생겼나 봐. 네가 씻는 동안 전화 왔어. 엄마 전화로 한 번 해 봐.” 엄마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은율이가 수박을 한 입 베어 물며 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가 전화를 받아 말했다.
“은율아, 나 어떡해? 큰일 났어.”
“왜 무승 일이양…?” 입안에서 수박이 돌아다녀 발음이 새어 나왔다.
“너 발음이 왜 그래?”
“응, 나 수박…”
“너 지금 수박 먹을 때가 아니야. 아… 나 어떡해…” 갑자기 지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가 미국 디트로이트라는 도시에서 2년간 일을 하게 되었대. 그래서 우리 이사 가야 한대.”


은율이는 너무 놀라 싱크대로 가서 입에 있던 수박을 다 뱉어 버리고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디트로이트가 어디야? 얼마나 먼데? 언제 가는데?”
질문이 마구 쏟아졌다. 둘은 그 이후로도 한참 통화를 이어 갔다.

전화를 마친 은율이는 “엄마, 나 오늘은 밥 생각이 없어.”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다 다시 나와 은호 오빠 방 컴퓨터를 켜고 ‘디트로이트’를 찾아보았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평소 침착한 은율이는 생각보다 마음을 잘 추스르고 지호에게 정성스러운 편지를 써 놀이터에서 만나 건넸다. 2학기 시작 후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지호는 디트로이트로 떠났다.


은율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물론 모둠 활동을 할 때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지만, 지호가 떠난 뒤 마음이 많이 허전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다. 언제나 친구 같은 은율이 아빠가—물론 지호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방학 동안 주말이면 극장도 같이 가고 스키장도 같이 가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지호의 소식은 같은 동네에 사시는 지호 할머니를 통해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친구를 잘 사귀는 지호는 미국에서도 영어가 많이 늘고 여러 나라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했다. 언젠가 지호를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지호를 향한 그리움은 조금씩 옅어져 갔다.


3학년이 되었다. 은율이가 바랐던 것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친구들 중 두세 명—아니, 한 명이라도—3학년도 같은 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끔 준비물을 안 가져와 빌리고, 숙제가 뭔지 묻던 박우진이 유일하게 같은 반이 될 줄이야. 박우진과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말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그저 같은 반 아이였다. 그는 꼭 필요할 때만 말을 걸었다. 준비물을 빌릴 때, 숙제를 안 해 와서 급하게 베낄 때—그때마다 꼭 은율이에게 말을 걸었다. 은율이는 그냥 대답만 했다. 먼저 말을 걸어 본 적은 없었다.


은율이는 방과 후에 헤럴드 영어학원에 다녔다. 은율이는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잘 못 느꼈지만, 미국 사람들과 일하는 엄마는 “영어를 해야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며 영어학원은 양보하지 않았다. 영어유치원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던 은율이에게 쓰기·단어 암기·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수줍고 낯을 많이 가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늘 어렵던 은율이에게 ‘호주에서 오신 브라이언 선생님’의 수업은 너무 어려웠다. 몰라서가 아니라 천연덕스럽게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어려웠다. 브라이언 선생님은 친절하고 자상했지만 한국말을 거의 못하셨다. 그게 문제였다.


학원은 정기적으로 레벨 테스트를 해서 반을 조정했는데, 하필 은율이가 레벨 테스트를 너무 잘해 버렸다. 모기 목소리로 대답했는데도 브라이언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은율이에게 4월부터 어드밴스드 반인 ‘아인슈타인 반’으로 오라고 하셨다. 은율이는 너무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가기 싫다, 지금 에디슨 반에 남고 싶다”라고 말할 자신은 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4월 2일, 학교를 마치고 학원으로 갔다. 몸에 밴 습관대로 자동으로 에디슨 반으로 들어갔다가, 지나가던 브라이언 선생님이 은율이를 알아보고 “Eunyul, come here! Welcome to Einstein class!”라고 크게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은율이는 가방을 챙겨 옆 교실로 갔다. 문을 열고는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인슈타인 반에 박우진이 앉아 있었다. ‘박우진이 왜 여기에? 내가 아는 그 박우진? 공부를 되게 못하는 줄 알았는데, 나보다 상급반이라니?’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학교에서는 은율이가 도와줘야 하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학원에서는 전혀 달랐다. 박우진은 영어를 말할 때 브라이언 선생님처럼 발음했다. 첫 수업을 마치고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 최은율~ 네가 여기 웬일이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난 아인슈타인 반에서 제일 오래 다녔어. 브라이언 선생님 오기 전에는 라일리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다녔어.”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반이 하나 올랐을 뿐인데 왠지 듣기와 말하기 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안경 너머로 눈을 껌뻑껌뻑 떴다 감았다 하며 시간이 천천히 가고 식은땀이 맺히던 찰나—박우진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당신은 다른 나라로 여행 가 본 경험 있나요?” 하고 혼잣말처럼 힌트를 던졌다. 일부러 능청을 떨어 은율이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휴—” 고비를 넘긴 은율이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 날 학교에서 박우진을 보면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우진은 좀 특이했다. 은율이와 전혀 달라서 더 그랬다. 그는 묻지 않아도 학원에서 만나면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왜 발음이 좋은지—일곱 살 때 엄마와 말레이시아에서 1년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 같은 아파트 119동에 산다는 것. 주말마다 아빠와 축구를 한다는 것. 양념치킨보다 후라이드치킨을 좋아한다는 것. 편견이 걷히자, 은율이도 박우진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긴 해도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자신과 전혀 다른 그가 학원에서 수다를 떨면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느덧 3학년도 여름방학을 지나 가을 문턱을 넘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은율아, 다음 달에 엄마 회사 창립기념일 체육대회를 하는데 가족을 초대하기로 했어. 먹거리 부스에서 쿠폰으로 맛있는 것 사 먹고 놀 거고, 경품 추첨도 다양해. 같이 갈래? 엄마는 은율이에게 엄마 일하는 곳도 보여주고 싶어.”
“경품이 뭔데? 생각 좀 해 볼게.”
“아마 거부할 수 없을 걸? 에어팟이랑 자전거, 문화상품권도 있고… 암튼 많아.”
“에어팟은 당기는데… 그럼 가지 뭐.”


10월의 어느 토요일, 약속대로 창립기념일 행사에 나섰다. 사람 많은 자리가 부담스러운 은율이는 검은 야구모자를 쓰고, 위아래 검은 운동복을 맞춰 입은 채 엄마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엄마가 인사를 시키면 꾸벅 인사도 잘했다. 엄마가 준 쿠폰으로 컵떡볶이를 사서 이쑤시개로 콕 찍어 먹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후드티 모자를 잡아당겨 “켁!” 하고 입에 있던 떡이 목에 걸릴 뻔했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뒤를 돌아보니—박우진이었다.

“야, 최은율. 너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나 엄마 따라왔는데. 너는?”
“대박. 우리 아빠가 이 회사 다녀서 따라왔지. 혹시 너네 엄마랑 우리 아빠 아는 사이야?”
“내가 어떻게 알아?” 은율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얼마 후 박우진을 찾으러 온 아빠가 엄마와 인사를 나눴다. 다행히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엄마 회사가 크니 그럴 수 있었다. 그래도 서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뭐지, 이 기분. 왜 박우진이랑 자꾸 엮이지?’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은율이는 천천히 박우진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다정하지는 않아도 필요할 때 서로 돕고,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4학년이 되어 학교에서는 박우진과 다른 반이 되었지만, 학원에서는 여전히 볼 수 있을 테니 아쉽지는 않았다. 3학년을 지나며 두 아이 모두 키가 쑥 자랐고, 제법 십 대 소년·소녀로 우정을 쌓아 갔다. 박우진이 떠났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4학년 3월 학원 첫 영어수업, 여느 때처럼 학원에 가서 아인슈타인 반 교실 문을 열었는데 조용했다. 몇 명 먼저 와 있었지만, 시끄러운 박우진이 없으니 소곤소곤한 말소리만 들렸다. 선생님이 들어와 책을 펴고 수업을 시작했는데도 박우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픈가? 왜 안 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은율이는 박우진과 같은 반인 친구에게 슬며시 물었다.
“하영아, 너 박우진 봤어? 여행 갔나? 나 학원에서 선생님이, 박우진이 결석해서 이달 교재 좀 가져다주라 하셨는데… 안 보이네.” 은율이 답지 않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하영이가 말했다. “은율아, 너 몰랐어? 박우진 전학 갔어. 장래희망이 축구선수래. 그래서 제대로 훈련받을 수 있는 학교로 갔대.”

은율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친구가 되었나 했는데, 박우진은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났다. ‘나중에 커서 혹시 만나도, 아는 척 하나 봐라.’ 속으로 서운하게 생각하면서도,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씩씩하게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엔 학원에서도,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종종 박우진이 떠올랐지만 차츰 기억 속에서 옅어졌다.


지호 덕분에 즐거웠던 2학년, 박우진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던 3학년이 지나갔다. 이제 지호도 없고 박우진도 없는 4학년의 은율이는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다행히 은율이 마음도 자라고 있었다. 저녁밥을 뜨며 은율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박우진 기억나지? 그 애 전학 갔더라. 축구한다며 다른 학교로 갔대. 그 애가 뭐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었지만… 지호도 미국 가고, 박우진도 가버렸네. 허.”
“우리 딸 속상하겠다. 그래서 4학년이 막막해?”
“조금. 아니, 괜찮을 것 같아. 또 누군가 나타나겠지.”
“맞아. 엄마도 기도해 줄게. 우리 딸 4학년 잘 지내고, 좋은 친구 만나게 해 달라고.”


엄마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조금 다르게 응답되었다.


체육 시간이 되어 반 전체가 다 같이 체육관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체육관에 처음 보는 분이 계셨다. 학생 같기도, 선생님 같기도 했다. 하얀 체육복을 위아래로 입고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얘들아, 4학년 친구들과 올 한 해 동안 체육을 같이 할 김지수라고 해. 선생님은 올해 처음 교사가 되었고, 너희가 첫 번째 제자들이 될 거란다. 너무 신나지 않니? 잘해 보자. 잘 부탁해.”
은율이는 어쩐지 체육 시간을 너무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았다.

‘뭐지? 지호 가고, 박우진 가고, 김지수 선생님이 오신 거야? 친구를 보내 달라고 했더니, 하나님이 새로운 선생님을 보내 주셨네.’ 하고 생각하는 사이, 피구공이 날아왔다. 운동신경이 좋은 은율이가 공을 탁 받아 상대편으로 힘차게 던졌다. 공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체육관 바닥을 치고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