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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창한오후 Oct 17. 2019

40년 전 유년기 기억들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걸로 남은 기억에 파편들

네 살 때.. 혹은 다섯 살 때

엄마는 포대기 친구인 왕근이네 엄마를 만나러 갔다고 했다.

몇 번 업혀가며 봐 둔 그 길을 잘 기억났던 건 분명 내가 똑똑했기 때문일 거야


신길동 대신시장 앞 큰 찻길을 건넜지.

울 아버지는 그 길을 '행길 조심하라'라고 표현했었는데 '한길'에 어른 말투인 건 나중에 알게 됐어.


네다섯 살이 뭘 알겠어.

처음 엄마 찾아 나선 목적은 잊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난 걸었다.

복잡한 행길은 몇 번 넘었던 듯해.

지독한 골목길을 지나 만난 이곳.

오비맥주 공장 정문 맞은편 언덕.


골목길 입구 허름한 국밥집 가마솥이 펄펄 끓고 있는 식당과 그 앞 행길. 

차가 무섭게 빠르게 달린다. 

건너 OB맥주 공장 정문.

본능적 불가능을 느낀다. 

더 이걸음을 포기한 채 멈췄지.


가마솥 식당 앞.

 그 집 아줌마가 앞치마에 손을 문대며

"엄마 어딨어?, 집이 어디야?"

우물쭈물하는 내 손 잡고 파출소에 데려다주신다. 


신광파출소.

몇 번 그 앞을 지나간 기억이 다.

집에선 멀었지만

여기부턴 혼자 찾아갈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아줌마는 순순히 보내주지 않는다..

파출소에 맡기고 총총 사라진 아줌마.


짙은..

아니 검은색 제복 입은 경찰이 묻는다.

무섭다.

경찰은 그런 존재였다.


"아가야 집이 어디야?"

무작정 울음이 나온다


흰색 페인트가 오래전 발라진 시멘트 벽과 교회에서 보는 나무 의자에 앉혀졌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낯선 경찰서 분위기.

경찰 아저씨는 쪼그리고 앉아 눈 맞추며 따듯한 표정을 알게 해 주었다.

우유와 100원쯤 되던 사각 카스텔라를 받고 먹으니

차츰 진정이 된다


"집이 어디야?"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요"


머릿속 집에 가는 길이 훤히 그려진다. 

설명하면서 오른손만 이리저리 꺾어댔는데

내가 생각해도 경찰은 알아듣지 못한 거 같다.


신기하게 얼마 후 아버지랑 여덟 살 위 둘째형이 나타나고..

검은색 끈 묶인 파일. 누런 갱지 위에 아버지는 빨간 인주를 묻혀 찍었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바로 출소(?)할 수 있었다. 

아직도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았는지 알지 못한다.


경찰이 왜 무서웠는지 생각해 보면 일단 제복에서 나오는 권위감?

어른들은 아이를 위협할 때 순사가 잡아간다 했던 유래로

울면 엄마는 경찰이 잡아간다고 겁을 주곤 했다.

(검정색 중학생 교복과 교모에도 경찰이라며 놀라서 멀찍이 피했던 기억도 난다.)


영화 1987만 봐도 경찰은 시민을 막 때리는데

1977정도는 오죽했을까 싶다.


이야기 나온 김에  

조선시대 공권력인 포도청.

얼마나 무서웠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다

법이고 나발이고 일단 잡혀가면 맞그래서 병신 된 사람 많은 무서운 곳인데

목구멍 = 포도청

먹고사는 문제는 정말 무서운 거구나!


네 살 때 구구단을 노래처럼 잘도 외워서 아버지는 보는 사람마다 자랑삼아 시키곤 했다.

아홉 살 국민학교에서 정규 교육으로 배울 때는 남들보다 늦어져 혼나며 다시 배웠다.


6학년 작은 형은 학교에서 주는 사각 곰보빵을 아껴서 먹지 않고 집에 있는 7살 동생을 가져다주곤 했다.  

토요일은 형이 일찍 와서 좋았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받은 빵을 집에서 기다린 고양이를 동생이라며 한 조각 남겨오곤 했지.

그렇게 유년기 기억은 조각조각 머리에 남아있다.  


떡 팔이 아저씨는

나무 프레임에 2층 유리상자를 등에 메고 다니며 망개떡을 팔았다.

이름도 모르는 간식인데 

그것은 마치 츄파춥스처럼 생겼다.  

성냥보다는 두껍고 긴 나무에 동그랗게 붙어있는

아마 찰떡 위에 팥고물 두껍게 뭉쳐 있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 아저씨 지나가면 꼭 세워 망개떡과 그걸 한 개씩 꼭 사주셨다.

얼마더라? 정확하진 않지만 20원?

그 기름진 잎새에 쌓인 망개떡도 막연한 기억에만 있었고

막상 이름도 모르며 수십 년 살다가 황학동엘 갔더니

등에 메던 그 나무 프레임 유리창 상자가 골동품처럼 있는 걸 발견.

거기에 기름진 잎사귀 위 떡.

추억에 깜짝 놀랐다.

그때 망개떡이란 이름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떡 하나 사다 드리며 이런 기억이 있음을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최근 친구와 술 한잔 하는데 어떤 떡팔이 아저씨가 한 바퀴 돌고 나가면서

"망개떡" 한마디는 갑자기 귀에 들어와 아저씨를 불렀다.

한 상자 오천 원짜리 두 개 사서 하나씩 들고 왔다.

그것은 유년 기억 어디 깊숙이 있던 걸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거지.


살고,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기억들이 저장되고 지워졌는데

지워진 줄 알고 잊힌지도 몰랐던 그런 것들.
오래된 컴퓨터 하드디스크처럼

계속 유년기로 재부팅된다.

 

난 그저그런 기억을 풀어놓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또, 의미 있는 듯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은 인생 살아가는 작동 원리에 알 수 없는 영향을 끼쳤을 거며

무의식 속에 깔려있는 그런 걸로 가지고 어떤 프로그래밍된 채 살아왔음을 느껴.


지금 자라고 있는 내 새끼들도 나중에 어떤 기억에 의한 작동으로 영향받아

결정을 하고 방향 잡아가려나!

알아서들 잘 크겠지만..


생각해보면 기억이란 쓸모없을 것 같은 것들에 나열인데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서 보배가 되는 것처럼

서 말 기억도 잘 연결해 봄직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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