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 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드레아 Jan 06. 2020

그때, 진해 아가씨 이야기 6편

[등장인물]


 고애련: 스물둘, 진해 토박이, 친구와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머슴 아가씨 (화자)

 고수련: 스물다섯, 진해 출신 천생 여자, 배터리 회사 경리

 이태은: 서른, 충남 출신 해군 대위, 동남아 사람처럼 얼굴이 새카맣게 탄 남자

 서철곤 : 스물다섯, 오사카 출신 철강 비철 원자재 유통 사업가




[1971년 7월]


 오토바이를 타고 양어장 근처 갈대밭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탑산 밑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오늘은 왠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 나이 이제 스물둘. 이제 노는 것도 지쳤다. 이젠 어떻게 살지 좀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수련 언니는 2년 전부터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있다. 적금도 매달 붓고 있으니 모르긴 해도 꽤 모았을 거다. 천생 여자란 소릴 듣는 언니는 이제 좋은 남자만 만나면 만사형통이겠지.


 ' 오데 돈 쫌 왕창 벌 수 없으까? 작은 아부지네는 오래 전부터 사업을 해서 억수로 부자로 사는데 우리집은 와 이렇노? 내는 남자도 지금은 필요엄따. 빨리 자리 잡아가 폼나게 살아야지. '


 작은 아버지 주유소 하시는 데서 아르바이트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모으고 작은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업하시는지 내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1971년 9월 진해 경화동]


 " 어서 옵쇼! 얼마나 하까예? "


 " 만땅 채우이소 고마! "


 " 휘발유 만~~땅~~~ "


  아직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나 이곳에 처음 들어와 일을 시작한 8월에 비할 바 아니었다.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줄곧 선 채로 주유소일을 하는 것이 쉬운 건 아니었다. 팽팽 놀다가 하루 종일 자유 시간도 없이 땡볕에서 주유소일을 해 보니 너무 고됐다. 게다가 집에는 비밀로 일하는 거라 언제 들켜 아버지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날지 모르는 나날을 보냈다. 작은 아버지는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 좁은 진해 바닥에서 소문이 금세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 아가씨, 이거 가득 채워 주세요! " 혼자 기름 스탠드 앞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최근 자주 오토바이에 기름을 채우러 오는 장발의 손님이 나타났다.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주변 거리

 짜리몽땅. 내가 속으로 그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언뜻 보아도 165센티미터의 나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작은 게 아닐까 했다. 게다가 그 치렁치렁한 장발이 오히려 그의 키를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갈색 가죽잠바에 롱부츠라니 가관이었다.


 그는 기름을 채우는 동안 길 건너편으로 넘어가 담배를 피우곤 했다. 스탠드 옆에서 안 태우니 다행이었다. 가끔 무지한 남정네들이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대개는 주유소에서는 금연이라고 말해 주면 알아들었지만, 고집불통이 가끔 말썽을 피우기도 했다.


 " 주유소 일하면 돈 많이 벌어요? 하루웬종일 서서 일하는데 일반 직장보다는 많이 받아야지. " 주유를 마칠 때쯤 장발이 길을 건너와 시덥잖이 말을 걸었다.


 " 그라는 아즈씨는 돈 마이 버시나 보네예~ 여는 몸은 쫌 힘들어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거보다 쪼매 더 주거든예. " 다른 데서라면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기름 넣으러 온 손님이라 응수는 해 주었다.


 " 엄청 씩씩하시네요. 하하하. 얼마나 많이 주는지는 몰라도 젊은 여자분이 이런 데서 일하시니 대단하십니다. 다리 안 아프세요? " 장발이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으며 쓸데없는 말을 계속 걸어왔다.


" 더 마이 준다카몬 더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예. 젊은데 먼 일을 몬하겠으예~ "  실은 말을 받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면서 자꾸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 입은 왜 이리 싼지.



[2008년 10월 오사카]


“ 고 사장님, 제가 틀림없이 약속 지킬게요. 시황이 나아지면 손해 보신 부분 감안해서 더 높은 가격에 구매를 해 드릴게요. 이번 계약은 없었던 걸로 좀 해 주세요. 저 믿으시죠? 제가 다 책임지고 해결해 드릴게요. ” 김진무 부장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애걸하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같았다.


 김 부장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계약 가격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폭락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그가 일본에 와서 구매계약을 맺은 스테인리스 스크랩 가격은 톤당 30만 엔이었다. 구매량 1만 톤에 금액으로 환산하면 30억 엔짜리 계약이었다. 그런데 계약 직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촉발한 리만브라더스의 파산 신청을 신호탄으로 전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금융위기 소용돌이 속에 빠져 버렸다. 주식 시장도 하루하루 폭락을 거듭했고, LME 선물 시장을 대표하는 모든 비철 가격과 원유, 석탄, 철광석 등 원자재 가격이 동시에 폭격을 맞은 건물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계약 후 한 달 만에 톤당 30만 엔짜리 스테인리스 스크랩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K사에서 이 계약을 취소하게 되면 우리 회사는 15억 엔의 손해를 입게 될 판이었다.

 ‘ 회사의 일 년 매출이 250억 엔 정도 되고 영업이익은 2억 엔에 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15억 엔이 날아간다면 우리 회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거래 은행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출금을 바로 회수하려 들 텐데… 어떻게 하나.. 이걸 어떻게 하나.. '


 K사 김 부장이 서울에서 날아왔다 돌아간 이후 세상은 암흑과 혼돈으로 변해 버렸다. 그동안 K사와 함께 했던 희로애락의 이십 년 세월이 눈앞에 잠시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블랙홀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이 회사를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데, 나와 직원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버텨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더 이상 세상은 나에게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고, 무언가를 먹고 싶은 욕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잠결에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없을까.. 누군가 나를 깨워 이것이 악몽이라는 걸 증명해 주지는 않을까.. 도대체 세상은 정말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계속)



https://brunch.co.kr/@ndrew/370


매거진의 이전글 40년 전 유년기 기억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