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년 전 관람했던 레미제라블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교황청 파롤로 국무위원장님께서 문재인 대통령님께 '하나님의 섭리를 행하시는 사람'으로 칭 했습니다.
오 년 전 두 번째 관람했던 영화 레미제라블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2013년 2월 13일 글.
지난 일요일, 영화는 전국 7 개관만 허락되어 있었다.
결국 충무로 대한극장까지 원거리 솔로 관람했는데 이게 나한테 뭔 일인가 싶다.
내 인생에 극장에서 두 번 관람한 영화는 중딩시절 용형호제 2 이후 처음이다.
레미제라블
이 영화는 절망의 끝에서도 '나눔의 삶'과 '용서'를 생각하게 해 준다.
일단 좀도둑 장발장.
수감 19년 동안 케케히 쌓인 분노와 증오 덩어리인 사나이.
가석방으로 얻은 자유는 냉담한 사회로 인해 더욱 비참한 현실을 만난다.
이 전과자는 눈곱만큼 희망 없이 절망으로 버려지는데
과연 이런 사람이 신분세탁 9년 만에
직원 100명 넘는 회사를 소유하고,
한 도시를 모범적으로 만든 시장이 될 수 있은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인가!
그중 성자 미카엘 신부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이 분의 영혼구원을 받은 장발장은 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나누는 삶을 살게 된 그 자신이 성자가 된 거지.
나눔.
무엇보다 장발장 본인에게는 성공과 존경받는 지위를 가져다준 이유였다.
나는 그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를 대입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처럼 나누는 삶을 살 수 없다고 느껴지는 건
아직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어 진다.
나눠야 더 커지는 진리를 어렴풋이 알듯도 하고..
아무튼 쉽지 않다.
쫓겨난 가난한 미혼모 판틴은 결코 많지 않은 빚에 쫓기며,,
악덕 숙식업소 부부에게 맡겨놓은 딸 코제트를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
막장에 몰려 이빨마저 뽑아 팔지만 결국 창녀가 되어 더 이 없는 나락으로 추락된다.
최악의 상황에서 장발장을 다시 만나는 것은 장발장으로 보나 판틴으로 보나 쌍방에 큰 도움이 되는 사건이다.
이 버림받고 죽어가는 여자를 만난 장발장은
그녀를 구원하고 핍박받는 딸 코제트를 구출하게 된다.
불과 9년 전에는 미카엘 신부께서 주님을 대신한 구원을 받았던 그가 아녔던가!
'주님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라...'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느껴진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이 표현!
용서.
자베르 경감은 법과 원칙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람으로 쉽게 악으로 규정 지을 수없는 독특한 존재인데
지독한 스토커 같던 그에게 평생 쫓기며 살아온 쟝발쟝.
결정적 기회로 자베르의 생사여탈권을 받는다.
그는 즉시 그를 용서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 더구나 이런 끝장나는 관계에서?..
용서란.
남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채워진 수갑과 족쇄를 여는 열쇠가 되어
높은 수준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엄정한 이 자베르마저 무너지게 하는 더 큰 힘이 용서가 아닌가!
아주 사소한 상대방 잘못에 분노하는 나를 만나는데 부끄러울 뿐이다.
중국 속담에
'큰일은 작게 만들고, 작은 일은 없는 걸로 한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히려 '작은 일을 크게 만들고, 크게 만든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억눌려 있는 것'이 아닐지!.
오래 살아가다 보면 결국 큰일도 없고, 작은 일도 없을진대.
뭐에 그리 억눌리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