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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창한오후 May 24. 2016

이발소와 면도

어릴때 아버지와 갔던 이발소의 추억

"누가 보면 니 친구라 그러겠다. 허허" 

국민학교 2학년 때쯤 이던가? 
그때 이미 오십을 넘긴 아버지 따라 이발소에 갔었는데 
깨끗하게 이발과 면도를 받은 아버지는 이발소 문을 나서며 막내인 내게 웃으며 한 말씀이다.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대화는 대부분 중요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때 가벼운 농담이 이렇게 길게 내 귀에 살아남아 있었다니 

고등학교부터 미장원을 갔으니까 이발소 안 간지는 수십 년이라고 해도 될만하다. 
지난달 아무 이유 없이 이발소를 가고 싶더라고. 
그렇게 찾아간 이발소에는 예상치 못하게도 초딩 애들 둘이서 머리를 자르고 있네? 
'요즘 부모들도 애들을 이발소에 보내나?'

콧수염을 기른 이발사 아저씨는 홍콩영화에 단골로 나올 듯한 인상이고
실내는 깨끗하지만 낡은 인테리어. 
미장원과는 또 다른 이발소용 특수 의자와 연통 난로가 있다. 
그리고 당구 채널이 나오는 작은 브라운관 TV에는 해설이 연신 나온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예 그냥 이 스타일에서 단정하게 깎아주세요"
그리곤 대화 끝. 

너무도 과묵한 이발사 아저씨께
"당구를  좋아 하시나 봐요?"
"당구 치세요?"

"예! 200 다마지만 잘은 못 쳐요"
"저도 잘 못 쳐요" 

그럴 리가 없어 보일 만큼 고수의 향기가 뭉클 느껴진다. 
그리고는 또 대화 단절. 

직전에 갔던 남자 미용사는 말이  엄청 많았던 것에 비교된다. ㅎㅎ

"면도하시겠습니까?" 

'면도?' (할까 말까 0.5초 망설이다.)  
"아뇨"

하늘 보고 머리 감는 미장원과 다르게 세면대를 보고 허리를 굽혀서 머리를 감고 나왔다.  
머리가 다시 자라서 이발을 해야 하겠다 싶었던 요 며칠.

왠지 그때 못 받은 면도를 꼭 받아보고 싶어 졌기에 오늘 아침은 세수만 하고 출근했고,
시간을 내어 점심에 다시 찾아갔다.    


<< 내부 사진을 몰래 찍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상가점포다. ㅎㅎ>> 


꽉 짜진 젖은 수건이 얼굴에 올라올 때 이발소에서만 맡아볼듯한 하이타이 같은 냄새와 뜨끈함. 
'아 따듯하고 좋다.' 

"드득~ 특. 드드득"
크림 로션을 마사지하듯 얼굴에 바른 뒤 날카로운 금속성이 훑고 지나간다. 
나이 사십 중반이 되어보니 수염도 더 굵어졌지만 양도 많아졌다. 
모공이 없던 부위에 새로 생긴 털들도 영역 확보 알리듯 두꺼워진다

내가 잘 깍지 못하던 이마와 광대를 지나 귀 테두리도 한번 칼이 쓰다듬는다.  
순간 
'이거 칼은 소독을 하고 하는 건가?' 싶은 생각. 
면도기는 개인위생 용품이라 자못 걱정이 됐으나 이내 마음이 놓이던데
솜씨 좋은 장인처럼 피부에 상처 없이 수염만 잘라 나간다. 

수염이 난 뒤로 한 번도 남에게 면도를 맡겨 본 적이 없던지라 기분 묘하다.  
치과의자처럼 누워서 얼굴은 좌우로 돌려지며 목부터 구석구석 빠짐없이 
칼이 지나간다. 

'혼자 화장하던 여자가 전문 메이크업을 처음 받는 기분도 이와 다르지 않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중 

끝내.. 

끝내..

콧속 털도 쪽가위로 가다듬어 주신다. 
아~! 남자만 아는 이 기분.. 

긴 듯 짧은 시간 맡겨진 내 얼굴의 매끈함에서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장원에서는 받아 본 적 없는 남자를 위한 서비스. 

이발비 8,000원, 면도 비 4,000원

외진 동네기도 하지만 매우 착한 가격이다. 

아마 다음에도 이발소에서 계속 면도를 받을 듯하다. 

오늘 난. 남들이 
우리 둘째 막내 한중이와 친구로 보지 않을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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