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너드 캐릭터는 야외 활동을 하지 않아 창백한 피부에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옷차림, 두꺼운 안경에 더벅머리이다.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에 나오는 과학 덕후 4인방 캐릭터에서부터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 스티브 잡스 등 보통 사회성 부족한 천재 공대생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것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너드는 분야를 떠나서 옷이나 겉치장, 사회적 권력이나 명성, 육체적 만족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며 고유의 가치 체계가 확고한 사람이다.
너드의 역사는 꽤 길지만 그 안에서 여자 너드를 찾기란 조금 힘들다. 너드의 세계를 소개하는 책 <너드>(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유영미 옮김, 작은씨앗)에서는 그 이유로 여성이 목적이 분명한 일을 하느라 너드적인 기질을 개발시킬 수 없었다든가, 두 대뇌 반구를 연결해 주는 '뇌량'이 남성보다 여성이 더 발달해있다는 생리학적인 근거를 들지만 그것만으로 9:1이라는 비율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 왜 여자 너드는 없는 걸까? 내 생각에 여자 너드는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분명 적지 않은 '너드 걸'이 존재했다. 너드 걸은 보통 반에서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정도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으며 혼자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중간한 여자애', '이상한 여자애'라고 불리기도 한다. 너드 걸은 세상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 옷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자신은 '사랑받는 여자아이'와는 거리가 먼데 자꾸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너드 걸 중에 '너도 좀 꾸미고 다녀', '여자애가 머리를 왜 그렇게 짧게 자르니?', '왜 여자애가 그런 걸 좋아해?'라는 말을 듣지 않은 소녀가 있을까? 짧은 머리가 좋고 편한데 단지 예쁘게 보이기 위해 머리를 길러야 한다는 말이 너드 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 이 세계에서는 아름다움이 편리함을 언제나, 절대적으로 이기는 것일까?
어차피 주변에는 너드 걸의 세계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니 소녀는 점점 사람들과 관계 맺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에 갇힌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세계와 연결되기 위한 매개체를 찾는다. 과학, 철학, 만화, 글, 그림, 음악, 게임... 무엇에 집착하든 가까이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기에 책만큼 좋은 것은 없다. (게다가 잔소리하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위장하기도 좋다.)
너드 걸과 세상의 불화는 사춘기 때 정점에 달한다. 너드 걸이 우리 눈에서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 시기다. 대다수의 너드 걸은 세상의 가치에 맞춰 억지스러운 사회화의 길로 들어선다. '쌍커풀만 있으면 참 예쁠 텐데', '살을 조금만 빼면 보기 좋겠어', '너무 마르면 남자들이 안 좋아해', '가슴이 작아서 어떡하니', '네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든 일단 예쁘게 보이는 게 중요해'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굴복하고 '단점'이라고 지적받은 것들을 고치기 위해 체형 보정 속옷을 사고 화장을 하고 불편한 옷을 입는다. '왜 내가 가치를 못 느끼는 것에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까.' 마음속 깊은 곳은 의문투성이이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단점'을 하나씩 감출 때마다 뭔가 중요한 것이 하나씩 빠져나간다. 그렇게 너드 걸들은 사라져 간다.
극소수의 운 좋은 너드 걸만이 자신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자연스러운 사회화의 길로 간다. 아마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 가족이 있었거나 엄마도 너드 걸인 경우가 아닐까.
책덕의 코믹 릴리프 시리즈는 코미디를 자신과 세상의 매개체로 삼은 너드 걸들의 이야기이다. 책에서는 너드 걸이었던 저자들이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저마다의 색깔로 펼쳐낸다. <Bossypants>를 쓴 티나 페이는 어릴 적을 회상하며 '예쁘지 않고 조용하며 멍청했던 나에게 코미디는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도였다'라고 말한다.
<미란다처럼>을 쓴 영국 코미디언 미란다 하트는 키가 180cm에 육박해 곧잘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는데, '여자답게 꾸미고 다니라'는 친구의 말에 눈썹 염색이나 얼굴 마사지나 예쁜 핸드백이 있어 봤자 조금 나은 버전의 자신이 될 뿐이니 적당히 깨끗하고 건강한 상태만 유지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물론 뷰티 유튜버가 아름답게 변신하는 메이크업 과정을 경이로운 눈으로 구경하는 나이지만 예뻐지는 방법과 수단이 과잉 공급되는 이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해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너드 걸들은 미용이나 패션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여자가 예뻐져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인도계 여성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민디 캘링은 <Is Everybody Hainging Out Without Me?>에서 누군가 자신을 뚱뚱하다고 한다고 해서 밤을 새우며 괴로워하지 않지만 멍청하다거나 재미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최악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신의 목소리와 강점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책 <예스 플리즈>에서 '자신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은 놓아주자.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섹시하다'라고 말하는 에이미 폴러는 젊은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에이미 폴러의 스마트 걸스'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홈페이지에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자(Change the World by Being Yourself)"라는 말과 함께 모든 이가 '이상하고 멋진 자신(Weird and Wonderful Selves)'을 찾기를 바란다고 쓰여 있다.
바야흐로 'Girls Can Do Anything(여자는 뭐든지 할 수 있다)'의 외침이 들려오는데, 과연 'Anything'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것이 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세상인가? 내가 어렸을 때 더 다양한 너드 걸들에 대한 책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어설픈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양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책의 세계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너드 걸의 수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로 지금 자신만의 이상하고 놀라운 무언가를 찾고 있을 너드 걸을 위하여.
* 이 글은 <기획회의> 471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