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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n 02. 2015

쪽팔리니까 인생이다

인생의 딸국질이 우리에게 주는 것, 웃음

당황스러운 순간! - 회전 초밥 컨베이어 벨트에 목걸이가 걸려서 식당을 반 바퀴나 쓸고 다녀야 할 때 ⓒ bbc one

미란다처럼 회전 초밥 테이블에 목걸이가 걸려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타 식당 안을 순회공연하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한밤중에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창피한 경험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대략 10여 년 전쯤 스타벅스니 커피빈이니 하는 커피 전문 체인점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들어서기 시작할 무렴 '에스프레소'라는 고약한 서양 음료 앞에서 쭈뼛거려본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메뉴판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있어 보이는' 이름의 음료니까 분명 탁월한 선택을 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소주잔...이 아니라 에스프레소 잔. 보기만 해도 위장이 쓰려올 만큼 검디 검은 에스프레소를 원래부터 의도했던 것마냥 여유를 부리며 홀짝여야 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당연히 원샷은 꿈도 꿀 수 없었다.)


Is It Just Me? 나만 그래요? ⓒ HODDER

『미란다처럼: 눈치 보지 말고 말달리기』의 원래 제목은 『Is It Just Me?(나만 그래요?)』다. 이 책이 나온 후 영국을 포함해 책이 출간된 나라의 독자들은 '어머, 미란다! 나도 그래요!'라며 미란다에게 무한공감을 보냈다. (실제로 독자들의 쪽팔린 경험을 모아 『No, It's Us, Too!(아뇨, 우리도 그래요!)』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역시 쪽팔림은 만국공통이로구나.


여기서 나의 쪽팔림 고백을 하나 더 풀어놓자면, 때는 바야흐로 2004년. 풋풋한 새내기가 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자 단단히 결심한 참이어서 무척 의욕에 가득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 그냥 여기까지만 쓸까... 에이, 이왕 쓴 거... 모르겠다!) 대학교에 와서 만난 친구가 이성친구를 불러서 같이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대체 그때 스무살의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뭔가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렉시의 '애송이'라는 노래를 선곡했다. (아마 고음불가였던 자신이 그나마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름의...) 그 노래가 처음 만난 남녀가 둘러앉아 있는 노래방에서 부르기에 그렇게 적절치 않은 노래일 줄이야. (나는 몰랐네, 정말 몰랐었네.) 배경음악은 왜 그렇게 비는지, 목소리는 꼴뚜기도 비웃을 정도로 메가리가 없고, 가사와 정반대되는 나의 쪼그라드는 손과 발... 애.송.이.들.아. 제발 노래방 전기라도 끊겼으면 하고 바라던 열창의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차마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10년 전 일인데도 이렇게 겨드랑이에 땀이 차오르다니...

하아... 과거로 돌아가 기억을 지우고 싶다... ⓒ BBC MIRANDA

미란다는 이런 순간들을 '인생이 딸꾹대는 순간'이라고 부른다.

인생을 길게 봤을 때야 이런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사건이 아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한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겪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제 말의 요점은, 여러분도 이렇게 인생이 딸국대는 순간이 힘들지 않느냐는 거예요. (『미란다처럼』1장 중)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이 딸국대는 순간은 줄어들기는 커녕 어쩐지 더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질투심과 열등감이 심해질 때가 있다. 세상이 자신의 독무대인 것처럼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저렇게 타고나지 않은 것일까, 심각한 땅꿀을 파고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미란다가 말했듯이 인생의 딸국질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저는 그저 부러움과 비참함을 느끼며 나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하고 거리낄 것 없이 산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그 자리에 있고 싶어 하고 파티를 즐기는 데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고 말이에요. 그때는 사람들이 굉장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죠. 실은 다들 남의 눈을 의식하고 있으며, 속으로는 그냥 집에서 편한 바지를 입고 텔레비전이나 보고 싶어한다는 걸 말이에요. (『미란다처럼』1장 중)


설마 인생을 살면서 창피함이나 쪽팔리는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런 인간미 없는 사람과는 놀고 싶지 않다. 흥-) 결국 미란다가 책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란다는 자신의 찌질하고 쪽팔렸던 경험들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어 한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위로 방법이지만 효과가 큰 위로 방법이기도 하다. '너 혼자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모두 그래.'


여전히 쪽팔리는 순간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내 나름대로 그런 순간을 자연스럽게 넘기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1. 길을 가다가 자신의 차림새가 갑자기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 길거리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나는 움직이는 조형물이다.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는 개나 고양이나 만득이 풍선이다.'라고 최면을 걸면서 계속 걷는다. 특히 무생물에 빙의하면 효과가 더욱 좋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사람들은 모두 스쳐지나간 뒤일 것이다.


2.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뀌었거나 바닥에 철퍼덕 하고 넘어졌을 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뭐, 무슨 일 있었어?)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은 이상한 볼거리가 사라지면 그게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아리송해하며 시선을 거둘 것이다.


3. 빼도 박도 못하게 어색한 상황에 빠졌을 경우, 예를 들어 친근한 스킨쉽을 했을 뿐인데 부적절한 부위에 손이 갔을 때. 농담으로 상황을 무마시키고 다음에 이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나빠지지 않도록 한다.  "어이쿠, 더 밑으로 내려갔으면 오늘도 경찰서에 갈 뻔 했네요. 하하하하하-" (물론 상대에 따라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

인사를 뽀뽀로 받는 미란다의 스킬은 매우 고급 스킬이므로 따라할 때 주의가 필요 ⓒ BBC MIRANDA

4. 그래도 이불을 걷어차고 싶어질 때는 미란다를 떠올린다. 초밥 컨베이어 벨트 위를 휘젔던 미란다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마 큰 위안을 얻고 금방 평정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세련된 사람들이 가득한 파티장에서 옷이 홀딱 벗겨지는 장면이라든지, 야심한 밤 국립공원 대문에 벌거벗은 채로 낑겨있는 장면이라든지...)


옷 예술적으로 벗기 상이 있다면 대상감 ⓒ BBC MIRANDA

어렸을 때는 빨리 창피 당하지 않는 우아한 어른이 되어서 능숙하게 어른의 세계를 헤쳐나가기를 바라기도 했다. 가게에 갈 때마다 점원이 나를 전담마크할까봐 쭈뼛대는 게 아니라 높은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다니며 세련된 가죽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쓱- 꺼내서 계산을 하겠지? 길거리에서 외국인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며 더듬더듬 대는 게 아니라 당당한 눈빛으로 쏼라쏼라 영어를 쏟아 내겠지?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실수나 황당한 사건 없이 고 하게만 진행되는 하루하루를 떠올려보면 숨이 막힌다. 어쩌면 찌질하고 쪽팔리는 순간들이 있어서 인생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10년 전 창피한 순간을 떠올리며 함께 을 수 .

ⓒ BBC MIR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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