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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Feb 28. 2021

웃기는 여자들이 세상을 뒤집는다

코믹 릴리프 시리즈 탄생 비하인드스토리

나는 왠지 자꾸만 웃기는 여자들에게 끌린다. <예스 플리즈>를 낸 후, 티나 페이의 <보시팬츠>와 민디 캘링의 <민디 프로젝트>까지 출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웃기는 여자들의 힘을 확인하곤 한다. ‘여자는 안 웃기다’ 혹은 ‘못 웃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인용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여성 코미디 파워를 보여 준 티나 페이는 자신의 책 <보시팬츠>에서 ‘니들이 좋아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며 오만하고 편협한 주류 문화에 펀치를 날린다. <민디 프로젝트>에서 민디 캘링은 언론이 여성 코미디언에게 항상 묻는 한심한 질문, “여자는 안 웃기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말을 “개와 고양이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하는가” 같은 질문처럼 정당한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말이라며 답할 가치도 없다고 일갈한다.



사람들은 여성 코미디언에게 ‘여자라서 안 웃기다’며 여성성을 포기해야 직업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한편, 여성으로서 그들의 외모와 몸매에 대한 평가를 한시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대중의 이중적 시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웃기는 여자로 살아남기란 참 쉽지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외모 콤플렉스와 더불어 세상에 대한 화를 책에 쏟아낼 법도 한데 그들의 책은 그 모든 억압을 튕겨내는 유머로 가득하다.


<미란다처럼>에서 미란다는 키가 180cm에 육박해 곧잘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는데, ‘여자답게 꾸미고 다니라’는 친구의 말에 눈썹 염색이나 얼굴 마사지나 예쁜 핸드백이 있어 봤자 조금 나은 버전의 자신이 될 뿐이니 적당히 깨끗하고 건강한 상태만 유지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풀려진 다이어트 산업과 미용 산업을 신랄하게 웃음거리로 만들고 피부가 탱글탱글해지려면 기름진 도넛이나 먹으라는 유머를 날린다. 예쁘다는 항목 외에도 여자라는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가령, 유머라든지) 있음을 미란다를 보며 되새긴다. <미란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수식어는 ‘사랑스럽다’는 표현이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유행하는 옷을 입지 않아도, 몸매가 좋지 않아도, 말투가 나긋나긋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여자. 


<예스 플리즈>에는 에이미 폴러가 20대 시절에 잘생긴 남자친구를 사귀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보다 덜 웃겼던 남자라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몰래 훔쳐본 일기에서 자신에 대해 ‘웃기지만 그렇게 예쁘지는 않다’라고 쓴 글을 발견하고 우울한 시기를 겪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결국에는 괜찮아졌다고 덧붙인다.


“당신도 괜찮아질 것이다. 왜냐고? 애초에 나는 매력이 철철 넘치는 성격을 지닌 평범한 외모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인정하고 나자 모든 것이 훨씬 쉬워졌다. (…중략…) 자신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은 놓아 주자.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섹시하다”

-<예스 플리즈> (에이미 폴러 저, 김민희 역, 책덕) 48쪽



예뻐지는 방법과 수단이 과잉 공급되는 이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해 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저 모든 여자가 예뻐야 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외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당연한 말을 열심히 한다는 게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공기처럼 퍼져 있는 외모지상주의 속에서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태풍 앞 촛불처럼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귤껍질 피부, 하회탈 광대, 납작 가슴, 오크 뻐드렁니, 삐쩍 마른 무말랭이, 뚱뚱한 복코, 이상하게 휜 오다리… 전부 내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외모에 대한 지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민감한 사춘기에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그야말로 숨 쉬듯 저런 말을 듣고 산다면 어떤 누가 외모에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 경험이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여성이 겪는 일이라는 것이 킬링 포인트다. 여기에 대고 ‘예쁘지 않아도 된다’고?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일전에 강남의 대로변을 걷다가 “예쁘면 다야”라는 말이 커다랗게 새겨진 광고판을 보았다. 무엇을 광고하는 것인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런 노골적인 문구를 보란듯이 쓰는 곳은 성형외과뿐이니까. 그 당당한 광고판은 ‘다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이 똑같아지기 위해(혹은 그럴 고민을 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효율적인 주장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깊숙하게 내면화되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럴 시간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경우엔 책 만들기, 미드 보기, 기술 하나라도 더 배우기, 어디에 살지 고민하기 등이 있고, 민디 캘링의 경우엔 ‘베스파 타는 법 배우기’와 ‘영화에서 추격 장면 찍기’가 있다. 한때는 내 외모의 단점을 고쳐 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당연한 일이지만) 광대뼈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캐릭터를 그릴 정도로, 내 생김새를 어떤 기준에 맞추어 고쳐야 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살고 있다. 아마도 코가 크다는 외모 지적 때문에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것은 바보 같다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기보단 내 기준에 맞춰 사는 게 재미있다고 몸소 보여 주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정말 웃기는 여자들이 세상을 뒤집고 있다고 믿는다. 나와 코믹 릴리프 시리즈의 존재가 그 증거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242306

여성 코미디언에 빠진 너드걸의 출판 프로젝트 《이것도 출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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