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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Aug 25. 2022

세상에 없던 이상한 코미디언,
로스트 보이스 가이

말을 못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다?

'로스트 보이스 가이'로 알려진 리 리들리는 2018년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나가서 아이패드의 전자 음성을 빌려 코미디 공연을 펼쳤습니다. '주차 때문에 장애인 픽토그램 티셔츠 입었음'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재기 넘치는 촌철살인 멘트를 날리던 리 리들리는 시청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결국 <브리튼스 갓 탤런트>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웃든 말든 여러분 자유지만, 장애인이 공연한다는데
안 웃으면 다들 지옥에 갈 걸요?


https://youtu.be/l113YL1biTk

2018 <브리튼스 갓 탤런트> 리 리들리의 첫 오디션 영상



그러니까 제 진짜 이름은 리이고, 장애가 유명세를 타기 전부터 이미 장애인이었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에요. 생후 6개월까지는 아주 우람한 사내아이였어요. 그러던 어느날 입안에 염증이 생기더니 몸 상태가 나빠졌대요. 엄마 말씀에 따르면 며칠 사이 상태가 악화되어 고열이 계속되었고 구내염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중략...)
치료는 잘 됐지만 뇌졸중 후유증으로 몸의 오른쪽이 약해졌습니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약하다 보니 미드 〈워킹 데드〉에 나오는 좀비처럼 움직이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하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없게 된 거죠.
- <로스트 보이스 가이> 18쪽


‘그래, 이게 바로 나야. 맞아, 나 장애인이야. 이름보면 몰라?’


리 리들리가 직장을 그만두고 코미디언이 되기로 한 것은 2011년부터입니다. 어릴 때부터 TV를 보며 코미디언을 동경하던 리 리들리에게 함께 일하던 동료이자 친구 네이선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말 못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니!'라며 친구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리 리들리의 마음속에 토커(음성보조기기)를 이용해 자신만의 특별한 공연을 할 수 있겠다는 작은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애를 활짝 드러내는 재밌는 별명을 짓기에 이르죠. 


이런 예명을 쓰는 건 장애에 대해 솔직하고 싶어서이기도 해요. 무대에서 제가 불편한 존재가 되거나, 저로 인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제 이야기가 맥락을 벗어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관객들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 하거나 어색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딱 질색이에요. 스스로 ‘로스트 보이스 가이’라고 소개하면서 솔직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래, 이게 바로 나야. 맞아, 나 장애인이야. 이름 보면 몰라?’ 
- <로스트 보이스 가이> 18쪽


로스트 보이스 가이가 무대에 서는 이유는 무언가를 극복하려는 것도, 누군가의 희망이 되려는 것도, 장애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한 인터뷰에서 장애인을 대변하는 목소리'voice of disabled'라는 표현에 대해 그는 "(목소리 없는) 제가 그런 소리를 듣는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라고 말하기도 했죠.) 그가 무대에 서는 이유는 그저 무대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장애 드립을 치는 게 저한테는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바로 알아차려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처럼 여러분도 괜찮아지기를 바랍니다. 프릭쇼(기형적 외모의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삼던 일종의 서커스)를 하자고 무대에 서는 게 아니거든요. 어떠한 동정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함께 웃으며 즐기기 위해 무대에 설 뿐입니다. 평소 장애에 대한 속사포 개그로 무대를 시작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시작해야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거든요.
- <로스트 보이스 가이> 18쪽


이 책은 리 리들리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담긴 생생한 이야기 보따리입니다. 어디에도 이렇게 솔직하고 유쾌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장애 개그 에세이는 없을 거예요.


책 속으로


처음 <로스트 보이스 가이> 기획서를 읽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아마존 리뷰가 발췌되어 있었는데 어떤 리뷰어가 남긴 한줄평이 이 책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유머로 가득차 있는데 사회의 편견과 둔감함까지도 조명해주는 멋진 책이다."
- 아마존 리뷰어 Dazaster

>>> 저야 일상에서 진짜 제 목소리를 매일 듣지만 아마 여러분은  절대 들을 일이 없을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글은 그 목소리로  쓰고 있어요.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온갖 생각을 담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해요. 떠오른 생각을 토커에 입력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요. 제가 말을 하고 싶다 해도 말할 기회를  잡을 새도 없이 그 순간이 지나가 버릴 때가 많아요.  좋게 보면 그 시차 덕분에 수많은 논쟁이나 육탄전에 휘말리는 일을  확실히 피할 수 있긴 합니다. 힘들게 입력할 필요도 없죠.  게다가 버럭 화내고 싶어도 토커의 목소리는  그렇게 들리지도 않잖아요. 그레이엄 선생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니까요. 〈영국 남성 그레이엄〉


>>> 제 마음은 가끔 보면 참 이상해요. 나한테 일어나는 일들의 재미있는 면을 발견하기를 좋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꾸만 되새기니까요. 그런 생각에 잠길 땐 울적해지죠. 만약 장애가 없었다면 삶이 어땠을까?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살면 어떨지 궁금해 하지만, 글쎄요, 저의 삶을 선뜻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노르만 정복〉


>>> 언제나 제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언론인이 될 거야. 대학에 갈 거야. 그리고 독립적인 사람이 될 거야.  장애는 제게 있어 큰 부분이지만 장애가 제 삶을 좌지우지하도록 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제가 용감하다거나 용기 있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싫습니다. 용감하다고 평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으니까요. 전 그저 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일 뿐입니다. 〈트랜스 음악에 빠진 대학생〉


>>>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요, 패럴림픽은 훌륭한 장애인만이 성공한 장애인이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처럼 보여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태도로 패럴림픽 경기를 본답니다. 그게 바로 문제죠.  상류 사회의 ‘감동 포르노’나 다름없고, 그 점이 싫어요. 장애인을 단지 ‘유능한 장애인’, ‘무능한 장애인’  이렇게 두 집단으로만 나눌 수 없어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접근이 왜 위험하냐면,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부 장애인은 지지와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암시하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영국을 대표하는 재능이 있는가?〉


>>>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면서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든 방향만 잘 잡는다면 유머의 소재로 써먹을 수 있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건... 끝내주는 발상이었죠. 이 생각 덕분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기 전 그저 친구들과 농담이나 주고받던  시절부터 부딪친 여러 한계들에 끊임없이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이 시리즈 덕분에 누군가를 웃겨야 할 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오히려 큰 강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거든요.  제가 가진 여러 희한한 특징들 때문에 움츠러들기보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소재로 여기게 되었어요. 관객들이 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것도 내심 즐기게  되었고요. 제가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웃으세요,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걸!〉


질문하기 전에 생각하셨나요?
호기심 많은 당신을 위한 TFAQ


TFAQ의 제목들을 나열한 이미지


이 책의 놓칠 수 없는 매력 포인트는 바로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TFAQ(Too Frequently Asked Questions)입니다. 리 리들리가 숱하게 들었던 무례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죠. 


당연한 말이지만, 친구들과 즐겁게 섞여 드는 일과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을 대면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죠. 저는 장애인으로서 어이없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데요. 생전 처음 만난 저에게 뭐든 원하는 걸 묻기만 하면 당연히 받아들여질 거라 믿거나, 저나 장애에 대해 뭐든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해도 무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옵니다.
(...중략...)
여러분이 대부분의 사람처럼 기본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싶지만 단지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 또는 다크웹에서나 할 법한 말들은 입에 담지 못할 사람이라 생각할게요. 그런 여러분을 위해 평생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질문들을 상세히 다뤄볼까 합니다. 일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공공 서비스랄까요.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지속적이고 지대한 공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뭐, 감사 인사는 넣어두세요.
- <로스트 보이스 가이> 41쪽


<로스트 보이스 가이>를 둘러싼
이상하고 특별한 만남 


이 프로젝트는 책덕, 피아바나나,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이하 '우리동작')가 함께 힘을 합쳐서 만들어가고 있는데요, 그 첫 시작은 최유정과 김헌용(피아바나나)의 기획에서 시작합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밥은 먹고 다니냐>에서 짧게 소개되기도 했었는데요. (영상의 시점에서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지금 부부가 되었답니다.) 

https://youtu.be/9YywY_KpKM8


프랑스어 통/번역가이자 오디션 덕후인 유정 님은 우연히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한 리 리들리를 보고 바로 팬이 되었고, 그가 쓴 책 <I'm Only In It For The Parking>을 발견한 후 헌용 님과 함께 한국어판을 내볼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헌용 님은 본인이 속해있던 우리동작의 중증장애인 번역가 양성 프로그램에서 <로스트 보이스 가이> 번역팀을 꾸렸습니다. 5명의 번역가가 번역을 하고 유정 님은 감수를 맡기로 했죠. 번역을 다 마쳐갈 때쯤 출판사를 찾던 유정 님은 책덕이 쓴 <이것도 출판이라고>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고 '코미디언 에세이에 이렇게 미쳐있다니 분명 <로스트 보이스 가이>도 좋아할 거야!'(직접 이렇게 말씀하시진 않았지만요...)라는 생각으로 책덕에게 기획서를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책덕, 피아바나나, 우리동작이 만나 1년 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텀블벅 프로젝트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제가 거절을 한 번 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책이고 대중적으로 더 많이 사랑받았으면 하는 책이라 (자본도 없고 인력도 없는) 1인출판사인 책덕보다는 큰 출판사에서 더 나은 지원을 받아 출판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책덕과 함께 하고 싶다는 기획자 두 분의 말씀에 완전히 넘어간 저는 생각을 바꾸었답니다. <로스트 보이스 가이> 한국어판은 책덕스럽게 태어날 운명이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책덕의 '새폴더'에 담아 함께 고민하고 의논한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낼 생각뿐입니다. 


�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한 만큼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겠죠? 그 이야기는 인스타그램에서 @fihavanana_books를 팔로우하시면 차근차근 들려드릴게요. 책덕의 브런치를 통해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로스트 보이스 가이의 매력에 빠질 준비 되셨나요? 지금 전국 책방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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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서점: 부천 빛나는친구들, 서울 마포구 서교동 번역가의서재, 강원도 속초 동아서점, 경북 포항 달팽이책방 등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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