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츄라이했더니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큰 꿈을 꾸기 마련이다. 나의 어릴 적 큰 꿈은 통/번역가가 되는 것이었다.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외국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전달하는 통역사를 동경했다.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안정적인 삶'에 대한 숭배, 영어 실력이 없을 뿐더러 문과는 커녕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열등감과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어딘가 그럴듯한 회사에 고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런 압박감에 몰린 선택을 되풀이하다가 꿈꾸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니, 어디든 나를 써줄 곳이 있다면 그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상에 내 모습을 규격화해 욱여넣으려 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흘러 어찌어찌 마음에 드는 출판사에 취업을 했지만 번역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번역' 자체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도전해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에 더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면접을 본 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쭈구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고 '아무도 나에게, 나의 가능성에 투자해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투자를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퇴사를 지른 후 퇴직금 600만 원으로 직접 출판사를 만들고 좋아하는 영국 코미디언이 쓴 책의 번역 판권을 산 후 1인출판을 시작했다. (출판을 시작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이것도 출판이라고>에서 읽을 수 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whatapublishing
지금 이렇게 몇 줄로 정리를 하니 매우 당차 보이지만 먹고 살 걱정을 안 할 수 없기에 출판을 시작하면서부터 N잡은 나의 생존 전략일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에 몸 담고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책 판매만으로 생계를 책임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도 하고, 매출을 올리기 위해 내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책을 많이 만들기보다는 진짜 좋아하는 책들을 천천히 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계획했던 대로(?) 출판한 책으로는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많아진 시간과 에너지를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출판 기록을 브런치에 연재하고 그걸 바탕으로 책을 출간하고 강의도 하고 클래스101에 온라인 클래스도 런칭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N잡을 시도했다. 크몽(탈잉, 프립 등)에 PDF 팔기, 조아라에 웹소설 연재하기, 아워플레이스로 부엌 대여해주기, 크라우드픽으로 스톡사진 팔기, 팟캐스트 제작, 작은 책방 운영, 굿즈 만들기, 네이버에서 스티커 판매하기...
나도 내가 이렇게 잡다하게 많은 것을 시도했었는지는 몰랐는데, 이번에 <츄라이, 츄라이, 민츄라이> 기획을 떠올리면서 정리해보니 참 많았다. 어쩐지 나 자신에게 감동하는 동시에 짠내가 났다. 물론 흥미로워서 시도해본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떻게든 취직 안 하고 자유일꾼으로 살아남을라고 용을 썼구나, 하는 생각에.
그동안의 N가지 시도들을 정리하면서 책 제목을 떠올렸다. 가지가지 N가지 시도? 흠, 그러고 보니 내 닉네임이 민트리인데... 다들 민트를 좋아해서 지은 닉네임인 줄로 짐작하지만 사실 내 이름 '민' 자에 영어 'Try'를 붙여 만든 닉네임이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갑자기 자신의 해외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먹던 거 말고 다른 음식을 시도해봤으면 좋았겠다고 늘 후회한다며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수학을 싫어해서 수업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이야기만은 어쩐지 뇌리에 남아서 네이버에 아이디를 만들 때까지 영향을 끼쳤다.
민트리는 17살 때 지은 나의 첫 닉네임이자 지금까지 쓰고 있는 이름이다. 몇 년 뒤 미국 드라마에 빠진 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 자신의 이름으로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이 좋아 보여서 따라서 목걸이를 만들었다. 어쩐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캐리의 목걸이랑은 거리가 먼 튼튼한 쇳덩어리 같았지만 나는 이 목걸이를 부적처럼 차고 다녔다.
그래서 이번 기획을 떠올리자 문득 이 닉네임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깨달았다. 요즘 밈으로는 "츄라이, 츄라이, 민츄라이!" 하면서.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딱히 쥐고 태어난 거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시도'말고 무엇이 있을까.
요즘엔 지난 시도들이 쌓이고 쌓여 내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야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난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도를 한 후에는 예상한 것 그 이상의 소득이 따라올 때도 있다. 어쩌면 그 의외의 소득을 만나기 위해 나는 '츄라이 중독'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다. 알 수 없는 브런치의 알고리즘에 의해 내 글이 브런치나 다음 메인에 뜰 확률은 (경험상) 희박하다. 이 글도 <츄라이, 츄라이, 민츄라이> 연재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글인데 그동안 올린 글 중 조회수가 100이 넘는 게 없었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텀블벅 프로젝트에 후원자가 늘 확률은 더 희박하다. 그래도 나는 이 연재를 끝맺으려 한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라도 누군가 검색을 하다가 이 글을 우연히 발견한다면 내가 시도하고 있는 일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귀한 '접점'이 훗날 어디까지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조아라, 유페이퍼, 크몽, 크라우드픽, 아워플레이스, 네이버 스티커...
여러 가지 N잡을 경험한 민츄라이의 수익 대공개 및 꿀팁 수록
전자책 <츄라이, 츄라이, 민츄라이> 텀블벅은 6월 25일에 마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