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저절로 팔릴 수는 없으니까요
인쇄소에서 책이 다 만들어지면 거의 모든 책이 바로 물류창고로 운송된다. 책이 창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창고를 찾았다. 도착해 보니 창고에 착착 쌓여 있는 <미란다처럼>이 보였다. 아, 내가 만든 책이 잔뜩 쌓여 있는 광경을 보는 기분이란… 한마디로…
많아서 좋다는 뜻도, 너무 많다는 뜻도, 정말 완성이 되긴 했구나 하는 뜻도 담겨 있는 아주 복잡미묘한 감정이 올라왔던 것 같다.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자식이 태어난 것처럼 기쁘지 않냐고 했지만 사실 나는 심란했다. 책을 열면 곧바로 잘못된 것만 눈에 들어올까 봐 한동안 책을 들춰 보기가 두려웠다. 내 자식이라 무조건 예뻐 보인다는 건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만들기 전에 잘할 것이지. 나도 참 구제불능이다).
책을 열심히 만들었더라도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니 그 책의 존재조차 알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책이 나의 손을 벗어나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책의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과연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이것을 확인하려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서점에 책을 입고해야 한다. 잠깐, 그 전에 책에 대한 정보와 소개 글을 담은 ‘보도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보도 자료는 책의 기본 정보와 책을 소개하는 글이 담긴 문서로,쉽게 말해 책의 핵심 포인트를 담은 홍보 자료다. 인터넷 서점의 책 정보 페이지에 적힌 내용(내용 요약, 저자 및 역자 정보, 짧은 서평 및 추천사, 홍보 이미지나 영상 등)을 떠올리면 된다. 새 책이 발간될 때마다 출판사에서 작성해 책표지 이미지와 함께 서점으로 보내면 서점에서 온라인 사이트에 업로드한다. 요즘에는 북트레일러 같은 영상 홍보 자료도 함께 올리는 경우가 많다. 보도 자료는 책 홍보를 위해 언론사에 보내는 자료이기도 하다.
책을 만들고 제작까지 해서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보도자료까지 작성하려면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책을 만드는 중간중간 어떤 문구나 내용이 들어가면 독자들에게 이 책을 매력적으로 소개할 수 있을지 메모를 해 놓는 게 좋다. 처음에는 책에 빠져 있는 상태라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수 있으므로 엑기스 중의 엑기스만 뽑아 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무래도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독자가 많으니 이 보도 자료에는 출판사에서 책 소개를 맡고 있는 서점 담당자와 최종적으로는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최대한 매력적으로
담아야 한다. 물론 이렇게 쓰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전세계의 편집자는 머리를 굴리고 있고 나 역시 쓸 때마다 끙끙 앓는다.
본격적으로 서점들과 계약을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인 알라딘과는 메일과 우편으로 서류를 주고받으며 계약을
완료했다. 한껏 힘이 들어간 보도 자료를 들고 MD를 만나러 갔다. MD 미팅은 미리 약속을 잡고 방문해 해당 분야 MD에게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큰 출판사에서는 영업자나 마케터가 나가기도 하지만 내가 다녔던 작은 출판사에서는 담당 편집자가 직접 가는 일이 많았다. 사실 직접 가 봤자 광고 이벤트를 하지 않는다면 반가운 반응을 얻기가 어렵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책의 소개를 듣느라 지친 얼굴을 한 MD 앞에서 텀블벅을 했고 미란다가 어쩌고저쩌고 주절거렸지만 별 다른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5분가량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밖으로 나오니 긴장을 많이 해서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다음은 교보문고였는데, 전부터 교보문고 신규 거래 안내 페이지에 ‘최소 2종 이상의 도서가 출간되어 있어야 계약이 가능합니다’라고 쓰여 있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다. 여기저기 출판 커뮤니티를 뒤져 보니 1종이더라도 출간계획서를 잘 써가면 계약을 해 주기도 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쯤에서 밝히자면, <미란다처럼>은 시리즈였다. 원래 시리즈였던 건 아니고 내가번역서를 만들면서 ‘코믹 릴리프’라는 시리즈명을 붙였다. 다음 책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면서 왜 시리즈를 만들었냐고?
아마도 어렴풋이 이 한 권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혹은 끝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책을 만들어 갈까, 생각해 보니 미란다처럼 ‘웃기는 여자들의 책’을 시리즈로 내면 좋겠다 싶었다. 코믹 릴리프라는 이름은 미란다가 참여하고 있는 영국의 유명한 자선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고, 원래는 연극 용어로 ‘비극이나 진실한 테마를 가진 희곡에 삽입하여 관객의 긴장을 일시적으로 풀기 위한 희극적 장면 또는 사건’을 뜻한다. 당시에 즐겨 보던 시트콤들이 여성 제작자와 배우가 참여한 작품이 많았는데, 그때 여성 코미디언들에게서 심각한 갈등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돌파하는 힘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 주는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각한 인생의 순간에도 유머가 필요하다.’ 그런 메시지를 담은 시리즈를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시리즈명이 붙은 책을 들고 당당히 교보문고 미팅에 갔더니 생각 외로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신규 계약 담당자를 만나서 계약서를 쓰고 오프라인 서점 MD를 만났다. 오프라인 서점 MD는 전국의 교보문고 지점(약 42개)에 책을 얼마나 보낼 것인지 결정하는데 이것을 초도 물량이라고 한다. 당연히 많이 깔리면 많이 팔릴 가능성이 높지만 <미란다처럼>은 예상했던 것처럼 그리 많은 부수를 가져가진 않았다. 42개 지점 중에 아예 책이 깔리지 않은 매장도 있고 광화문이나 강남처럼 큰 매장에도 2부 정도가 깔렸다. 그래도 ‘내지 디자인이 2도였으면 좋았겠다’, ‘가격이 좀 비싼 편이다’처럼 전문가 입장에서 바라보는 책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서 파주의 교보문고 본사까지 간 보람이 있었다. 그 후에는 인터넷 서점 담당 MD를 만나서 책 소개를 했다.
나중에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서 책이 어디 있나 한참을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매대 밑 책꽂이를 봤더니 거기에 꽂혀 있었다. 보통 신간이면 2주일에서 한 달 정도는 신간 매대에 올려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전혀 연관도 없는 곳에 있기에 담당 MD를 찾아보았다. 인사를 나누고 신간이라고 말하니 신간 매대로 옮기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오래가진 못했을 것이다.
한번은 인터넷 서점 MD에게 메일로 ‘웃기는 여성들의 에세이’를 함께 모아서 큐레이션 페이지를 만들어 보면 어떨지 제안했다. 물론 서점에서 기획해 놓은 이벤트 페이지가 이미 있었을 테니 긍정적인 답변은 오지 않았다. 돈을 써서 책을 만들었는데, 또 돈을 써서 책을 알려야 한다니.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인데 왜 자꾸만 광고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까. 매달 쏟아지는 신간 도서들 사이에서 커다란 대형 서점의 서가에 꽂힌 책. 그리고 온라인 서점 데이터베이스 속으로 숨어 버린 책. 과연 독자에게 이 책의 존재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