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안 나온다. 어제 서점에서 동파 방지를 하지 않은 어리석은 건물주 이야기를 하고서 맞이한 아침에 이 모양이라니. 민망하군.
"간재리, 물이 안 나와!"
아직 이불 속에서 꼼질거리는 간재리를 깨웠다. 번쩍 눈을 뜬 간재리는 '어떡하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언뜻 남자인 간재리가 알아서 뚝딱 하고 처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 치밀어오른다. 가부장적인 집에서 가부장적인 산교육을 받은 결과물이 내 마음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일단 수도계량기가 어떻게 됐나 가볼게"라고 하고 옷을 챙겨 입는다. 영하 8도에 달하는 날씨이니 맨발로 나갔다가 덜덜 떨 게 뻔하니 두꺼운 양말도 껴신는다.
두 개의 빌라가 어설프게 붙어있는 성삼빌라. A동과 B동의 대문은 다르지만 건물 옆으로 약간의 사잇길이 뚫려 있다. 사잇길을 지나가면 수도계량기를 덮고 있는 파란색 타원형 뚜껑 6개가 나란히 바닥에 누워있다. 어떤 게 우리집 거였더라. 오른쪽부터겠지? B101호, B102호, 101호, 102호. 오른쪽에서 네 번째 파란색 뚜껑이 깨져 있다.
'아, 이러니 계량기가 얼었지!'
너덜거리는 파란색 뚜껑을 여니 계기판 위를 덮고 있는 투명한 유리가 하얗게 얼어서 살짝 깨져 있었다. 낭패였다. 어쩌지, 어쩌지 라는 말을 조아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간재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각자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둘 다 엄마 찬스를 찾았다. 대답은 비슷했다. 안 쓰는 이불이나 두꺼운 담요를 계량기 있는 곳에 넣으라는 것.
나는 침대 밑 수납장에서 이불을 찾는 한편 스마트폰으로 '수도 동파 해결' 같은 키워드를 검색했다. 몇 가지 해결책을 보다가 눈에 번뜩 들어오는 게 있었다.
핫팩을 넣어보세요.
이거다 싶었던 나는 간재리에게 당장 소리쳤다. "간재리, 편의점 가서 핫팩 좀 사와야 겠어!"
"핫팩을 넣으면 된대?"
"응 괜찮을 것 같아. 열 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제일 나은 방법 같아."
"알았어, 내가 사올게.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어?"
잠시 후 편의점에서 돌아온 간재리의 손에는 핫팩이 한 8개 정도 들려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포장지를 깐 다음 수도 계량기 뚜껑을 열고 계기판 주위를 이불을 두른 다음 미지근한 핫팩을 사이 사이에 낑겨 넣었다. '따뜻해져라, 따뜻해져라~'
씻지도 못 하고 빨래도 못 하고 설거지도 못 하고 반나절.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씻는 것도 아니면서 반나절만에 기분이 엄청 찝찝하다. 30분 정도 흐른 후 물을 틀어보니 물이 아주 조르륵 흐른다.
"엄청 가난해진 기분이야"
문득 그런 말이 새어나왔다. 간재리가 공감한다는 듯 눈을 맞춘다.
"돈 벌어서 좋은 집으로 가자."
좋은 집으로 가면 이런 일이 없을까? 누군가 돈을 주고 사람을 시키면 편하게 금방 해결할 수 있게 될까? 그런 삶은 썩 달갑지도 기대되지도 않는다.
"아니야, 이런 게 사는거지. 퀘스트 해결해가면서."
"오, 긍정적이네?"
1시간 반쯤 흘렀을까, 기대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수도꼭지를 올렸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간재리와 사막에서 한 달 간 모래바람 맞으며 걷다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들마냥 펄쩍 뛰면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퀘스트 성공! 핫팩 아이디어 좋았지?"
"응, 민희 짱!"
검색해서 찾은 아이디어였지만 마치 내가 생각해낸 것마냥 생색을 내는데도 칭찬해주는 간재리가 참 귀엽다. 겨울살이의 무수한 퀘스트 하나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