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리 Jul 17. 2015

은둔생활백서의 시작

은둔생활백서의 시작

미란다 하트의 <Is It Just Me?>의 한국어 번역 판권을 계약한 후 드디어 번역을 시작해야 할 순간이 왔다. 계획 세울 때 가장 흥분하는 '계획성애자'라서  '빨리 번역해버려야지~!'하는 (가당치도 않은) 설레발을 치며 엑셀로 번역 스케쥴표를 짰다. 링크된 엑셀 파일의 날짜를 확인하면 알겠지만 택!도 없는 스케쥴이었다. (번역 초벌이 완료된 것은 2014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 판권 계약한 책 한 권을 껴안고 집순이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어쩐지 번역 진도는 안 나가고 돈은 별로 못벌고 하니 점점 뭔지 모를 죄책감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집에 있으면 시간이 무지하게 많이 남아돌아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밥 세 끼 챙겨먹고 정리하고 청소하고 낮잠(!) 자고 일단 먹고 살아야 되니까 외주 편집일을 하다 보면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 있고 계절은 바뀌고... 


이거 왠지 나... 쌩백수가 된 느낌이랄까...? 번역하겠다고 얘기해놓고 방구석에서 썩어가는 느낌이랄까...? 회사에 출근하고 정규 근무 시간을 보내고 퇴근하는 생활이 몸에 베어 있다 보니 집에서 혼자 일하는 데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인 듯했다. 회사에 출퇴근하면 어쨌든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도 들고 월급도 나오는데 이젠 그게 아니니까 초조하기도 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감시하거나 독촉을 하지도 않으니.


게다가 사업자 등록을 했더니 국민연금이고 건강보험이고 다 끊겨서 -_- 소심한 나의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여기서 잠깐 팁 하나!

출판 Tip. 번역서의 경우에는 에이전시에서 사업자 등록번호를 요구하므로 출판사 등록과 함께 사업자 등록을 해야 하지만 국내 집필서를 만들 경우에는 책 만들 때는 출판사 등록만 하고 세금 관련 처리를 해야 할 때 가서 사업자 등록을 해도 됩니다.
은둔생활백서 (풀버전 : http://beingbeingbeing.tistory.com/423)

이러다가 이도저도 못 하고 외주 편집일만 하다가 돈 벌기 위해 다른 일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게다가 번역해놓고 보니 '이거 누가 재밌다고 해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첫 장을 겨우 번역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줬더니 돌아오는 말.


"이건 너무 네 말투야. 미란다에 빙의를 하란 말이야! 더 재밌게! 더 익살스럽게 !"


네가 해봐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피드백 받을 곳이 많지 않았기에 성질을 죽이고 다시 번역한 원고를 들여다 보았다. 음- 너무 차분해. 내 말투가 너무 드러난 번역 원고는 확실히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먹고사니즘과 첫번역니즘(?) 사이에서 방황하며 시간은 계속 흘렀다. 자신감 곡선이 바닥을 향해 한없이 내리꽂히던 어느 날 밤, 나는 잠자리를 뒤척이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해야 할까,  정말 이 출판은 나 혼자 만족하자고 벌이는 자위 행위가 아닐까? 없는 살림에 너무나 사치스러운 돈지랄이 아닐까? 번역을 해도 다시 다듬고 편집하고 디자인까지 해야 하는데... 유통하려면 서점들과 계약도 해야 하고, 매달 물류 창고 보관 비용도 들 테고... 까마득하다... 무슨 책을 이따구로 만들었냐고 비웃음 당하진 않을까? 차라리 번역 판권을 다른 출판사에 팔까?


땅을 한참 파고 들어가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다시 (나 대신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거... 할까? 아니면 지금 때려 치울까?"


"음... 민트리가 정말로 하고 싶으면 해."


그게 그렇게 무거운 말일 줄이야. 대체 정말로 하고 싶다는 건 뭘까? 그냥 책 만드는 꿈만 꾸면 되지, 굳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예전에도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끝까지 가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모르겠다. 내 경우에는 예전과 달라진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절실함.  


물론 잘 안되면 언제 책 냈냐는 듯 입 싹 닦고 일 시켜줍소 하고 다른 회사에 들이대려고는 했지만, 그리고 망해도 그지꼴은 되지 않도록 소심하게 투자했지만, 그래도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데에는 '정말 이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절실함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기 보다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욕구가 더욱 절박했다. 


어쨌든 그래서 그 불안했던 시기를 넘기고 지금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왜 글만 쓰면 마무리가 이렇게 무겁고 진지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좋아하는 것을 실행하는 데는 '하고 싶다는 마음'으론 부족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제가 겪어본 바로는요. 제가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무리!

믿는 것을 실천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능력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미친년』7쪽
매거진의 이전글 책방에서 책을 사야 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