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의 파수꾼을 만나는 날
고등학교 때 알바비를 많이 준다고 해서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 있는 LG 핸드폰 공장에서 야간 알바를 했어요. 해가 질 때 공장에 들어가서 밤새 지정된 라인 앞에 서서 배터리를 포장박스에 넣다가 자정 가까운 시간에 밥을 먹고 다시 똑같은 일을 하며 밖에 나오면 어느새 아침 해가 밝아있었죠. 지하철 타러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트럭에서 팔던 토스트가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2주쯤 됐을 때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언니가 밤낮이 바뀌니까 피부가 뒤집어진다며 저보고 오래 일하진 말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요. 생체 리듬에 맞게 밤엔 자고 낮에만 일하는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한밤중에도 서울 곳곳이 밝디 밝은 지금, 야간 노동은 지금도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지요.
주말이면 대혼란이 일어나는 홍대 근처에 살다 보니 밤에 나갔다가 취객들이 버린 쓰레기에 깜짝 놀라곤 하는데요.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진 거리가 어쩌면 더욱 놀라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요정이 왔다 간 듯 흔적 없는 노동들. 보이지 않는 노동들. <달빛 노동 찾기> 서문을 보면 책의 주인공들이 ”단순히 일의 고충을 토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기를, 노동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였다고 써 있습니다.
<깊은 밤의 파수꾼>의 저자도 야간 노동자입니다. 15년 동안 야간 콜센터 노동자로 일해 왔다고 해요. ’싸나이‘답지 않은 태도를 지녀서인지 ’사내새끼가 계집애 같이 말을 한다‘는 말도 들었다는 저자는 ’여성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자 강요된 여성성임을 드러내는 것만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한 남자 상담사는 만들어진 성역할 장벽을 허무는 또 하나의 모델이자, 성별을 초월한 ’여성적 가치‘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이지요.
요즘 읽고 있는 다른 책 <편집 후기>에서 저는 남성인 저자 두 사람의 어떤 남성성이 겹쳐보이는 지점을 보았어요.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직업군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받는 남성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여성적 가치‘라고 불리는 행동을 체화한 직업인이라는 면일까요. (말주변이 부족해서 충분히 전달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남성성에 주목하는 것도 성별 고착화를 벗어나 우리가 서로를 돕기 위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찾아가게 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은 돛과닻이 펴내는 나날문고의 첫 번째 책입니다.
”나날이라는 단어는 ’계속 이어지는 하루하루의 날들‘을 뜻합니다. 돛과닻이 앞으로 꾸준히 펴낼 국내 산문 시리즈의 이름을 나날문고로 정한 것은, 노동하고 꿈꾸고 욕망하고 실패하고 성장하는 우리 삶의 진면목은 어떤 빛나는 찰나가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 하루하루의 나날 속에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돛과닻 인스타그램에서 발췌) @sailandanchor
계속 이어지는 하루하루를 따뜻하게 이어가기 위해 온기가 필요한 모든 분들을 초대해요. 함께 이야기 나누어요.
10월 25일 책덕 다용도실에서 <깊은 밤의 파수꾼>의 저자를 모시고 이야기 나눠요.
신청은 돛과닻 인스타에서 할 수 있습니다.
http://instagram.com/sailandanc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