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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May 29. 2015

미란다와 미란다와 미란다

뜻밖의 미란다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미드 <캐슬> 베켓 형사

경찰이 범인을 잡으면서 외치는 드라마 장면'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면 당신은 수사물 덕후!(....가 아니라)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이유는 수사기관이 범죄용의자를 체포할 때 용의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미리 알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고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자백은 무효 처리가 된다. 바로 미란다 원칙인데, 여기에 붙은 '미란다'가 부당하게 수사를 당했던 여성의 이름이 아닐까? 라고 짐작했다면 땡! 1963년 미국 애리조나에서 미란다라는 남성이 강간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 원칙을 고지하지 않아서 무죄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엔하위키 참고. 나름대로 권선징악의 결말?) 


갑자기 왠 원칙 타령일까? 미란다를 좋아하다 보면 다른 미란다와 마주치기도 한다. 특히 사회가 여성스럽다고 규정해놓은 외모를 다 피해가는 <미란다>의 미란다와 그야말로 여성스러움이 뿜뿜 뿜어져나오는 모델 미란다 커의 이름이 같다는 지점에서 나는 묘한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시니컬한 미란다까지 같은 이름을 쓰지만 각양각생인 미란다들에게 조금씩 공감하면서 어쩌면 내 안에는 이런저런 미란다들이 뒤섞여 있는 도가니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미란다라는 이름과 다양한 미란다들을 훑어보면서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미란다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미란다와 가장 닮았는지 잉여력을 발휘해볼까?


순진한 미란다

miranda는  mirandus에 파생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admirable존경하는'wonderful멋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성의 이름 치고는 그다지 여성적이지 않은 의미를 담고있다. '이름의 뒷이야기(Behind the Name)'라는 사이트에 따르면, 미란다라는 이름은 20세기 전까지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이지 않았는데, 셰익스피어가 <템페스트>라는 작품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하면서 여성의 이름으로 점차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템페스트>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보기 드문 판타지 희곡이라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 딸의 이름이 미란다이다. 어렸을 때부터 숨겨진 섬에 갇혀 살아서 세상 물정 모르고 한없이 순진한 캐릭터인데 나중에는 아버지를 계략에 빠뜨린 숙적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미모 출중 미란다


ⓒdiscutivo CC BY-SA 2.0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미란다'는 아마 모델 미란다 커가 아닐까? (요즘에는 영화 <스파이>에서 미란다 하트를 알아본 드라마 덕후들 덕분에 미란다 '하트'의 검색량이 늘고 있다고... 역전은 안될 거야...아마...) 미란다 커는 '러블리'라는 수식어가 찰떡 같이 어울리는 광대 미소와 러블리스럽지만은 않은 몸매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국내 연예인처럼 광고에도 많이 나오고 <개그콘서트>나 <마냐사냥>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아무렇지 않게(출연자도 알고 시청자도 안다는 가정 하에) 언급된다. 그녀가 신은 스킨톤(정확하게 말하자면 핑크빛 베이지색?) 하이힐은 수많은 짝퉁 구두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미란이'라는 애칭까지 만들어냈다. 요즘에는 좀 사그러들긴 했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녀가 일으킨 스캔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시니컬 미란다

정말 좋아하는 장면, 대낮에 맥주 마시며 청혼하는 미란다

그리고 미란다 홉스! <섹스 앤 더 시티>의 미란다는 내가 좋아하는 두 번째 미란다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한다기 보다 엄청나게 공감한다고나 할까? 미란다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나와 무척 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하버드대를 나온 잘나가는 변호사가 아니지만(갑자기 멀어지네...). 결혼이나 영원한 사랑 따위는 개코만큼도 믿지 않으며 네 명의 주인공 중 가장 건어물틱하며(집에서 심하게 편한 상태로 있는다는 뜻) 어떨 때는 남자친구보다 더 연애에 무신경하다.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가식과 감성의 흘러넘침을 견디지 못하는 시니컬한 미란다를 보면서 나란 인간은 미란다 홉스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코믹 에세이인 <미란다처럼>을 좋아해서 번역했다고 하면 나라는 사람을 끝내주게 웃기고 기~가 맥히게 재미있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웬걸. 처음 <미란다처럼>을 번역할 때 앞부분만 번역한 다음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돌아온 반응.


"이건 미란다가 아니라 너야. 딱딱하고 진지한 네 말투. 좀더 미란다에 빙의해봐! 웃기게!"


이렇게 웃기고 싶다규!

하... 미란다 홉스 유전자가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 쾌활한 글을 써야 한다니. 번역 작업 자체도 어려웠지만 미란다의 말투를 살려 옮기는 일도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별 수 있나. 봤던 시트콤 <미란다>를 보고 또 보고 반복해 보면서 미란다에 빙의하는 수밖에... 껄껄껄- (어어이, 노는 거 아니라구. 작업 중이야!)


어쩌면 내가 <미란다>를 좋아하는 이유도 내 안에 있는 웃기는 미란다스러움을 더욱 끌어내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들려오는 세상의 복잡한 사건사고를 접할 때는 순진한 미란다가 몸을 웅크리고, 예뻐 보이고 싶은 날에는 어떻게 하면 무심한듯 예쁘게 보일 수 있을까 섹시한 미란다가 고민한다. 글을 쓸 때는 시니컬한 미란다가 사사건건 딴지를 건다. '다 소용 없어. 허례허식 다 필요 없어. 본질이 중요해!' 그리고 그냥 혼자 방안에 누워 뒹굴거리거나 쿵쿵짝 힙합 음악에 몸을 맡기고 막춤을 추며 유치찬란 미란다에 빙의하고픈 날도 있다.


이렇게 내 안에는 다양한 면모가 있건만 가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저런 걸 싫어하지. 나는 저런 일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야.' 같이 특정한 타입에 나를 가두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단편적인 면만 보고 '나는 저런 짓은 절대 안 하는데... 나랑은 완전 다른 사람이군.'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릴 때도 있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 다른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내 속에서 어떤 미란다가 튀어나올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 바쁜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일 규정짓고 판단하며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것을 깨고 부수며 살아가고 싶다. 미란다처럼 해맑게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꿈꾸기에.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든지 여러분 마음이에요.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여러분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없겠죠." 

- 『미란다처럼: 눈치 보지 말고 말달리기』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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