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덕, 책방에 가다
'프루스트의 서재'라는 서정적인 이름을 접한 후, 과연 살짝 방정맞은 <미란다처럼>이 책방에 어울릴 수 있으려나 고민을 하면서 프루스트의 서재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홈페이지가 있는 책방은 몇 군데 없는데, 그 홈페이지조차도 흔하지 않은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가볍지 않은 글들이 적혀 있었는데 책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 쓴 게 분명했다. (지금은 홈페이지를 개편한 상태라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아쉽다. 기억을 더듬어 홈페이지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책 자체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을 볼 때가 있는데 어쩐지 홈페이지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참,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이곳 주인장의 과거 또한 예사롭지 않겠구나- 하고 짐작하였다.)
입점할 책을 짊어지고 신금호역에 내렸다. 오르막길을 슬슬 올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잠시 헤매다가 '이쯤이면 나올텐데...' 싶었을 때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라 살짝 놀랐다.
이런 책방의 풍경은 또 처음이다. 언덕 꼭대기에 인도도 없는 찻길 앞에 위치한 프루스트의 서재.
뭐랄까, 마구 치장하여 꾸민 멋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시류를 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멋이 느껴졌다. 오래된 듯하면서도 신선한, 그런 반대되는 듯한 감각이 프루스트의 서재의 첫인상이었다.
책방에 들어서면 먼저 꽉꽉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의 분류대로 세심하게 책이 채워져 있다. 책방 주인장이 모아온 책들이 하도 많아서 이 많은 책 말고도 아직 가져오지 못한 책이 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책덕후를 만났다.
이 공간은 바로 전에 옷가게로 쓰였다고 했는데 지금 모습을 봐서는 원래부터 책방이었던 것처럼 그 전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천장 가까이 자투리 공간에 책 선반을 달아놓는 것을 좋아하는데 프루스트의 서재 문 위에도 책이 착착 올려져 있었다. 책방을 둘러보고 이야기에 집중하는 바람에 사진을 많이 찍어오지 못했다. 아쉽지만 직접 이 공간에 가야 그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으니 직접 경험할 손님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프루스트의 서재에는 중고책이 많다. 중고책을 매입하기도 한다. 둘러보니 다양한 분야의 중고책이 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도 많다. 추리 소설 앞을 킁킁 거리다가 결국 한 권 집어오고 말았다. 그리고 안쪽 공간에서 아주 반가운 전집을 발견했다.
어릴 때 눈을 떼지 못하고 읽어댔던 빨간색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배 깔고 누워서 전집을 정복하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 담았다.
겉에서 보기와 달리 제법 넓은 공간이고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있어서 잠시 쉬면서 책을 읽다 가기에 좋겠다고 느껴졌다. 중고책들은 가격도 부담 없는 편이라 아마 우리 동네에 있었다면 아주 자주 왔을 것 같다.
가만히 책방을 둘러 보니 책상 아래쪽에 다소곳한 자전거가 눈에 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시나 보다 했다. 그리고 책방 이곶이 자전거로 금방인 거리에 있어서 가끔 왕래하며 이쪽 지역에서 함께 책방 행사를 꾸며볼까 생각 중이라고 하였다. 자전거로 두 책방을 오고가는 형식의 책방 투어(?)를 지나가는 말로 흘리셨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구미가 땡기는 기획이었다.
소규모 출판물도 조금씩 입점하는 중이고 프루스트의 서재다운 낭독모임도 꾸리는 중이라고 했다. 낭독모임 이름은 '달밤에 숨이튼' 줄여서 '달숨'이라고 한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최근에 창간한 소설 문예지 <악스트>를 읽기로 했다고 한다. <악스트>는 가격도 2,900원으로 부담 없고 기존 문단에서 살짝 거리를 둔 신선한 컨셉의 문예지라서 기존에 소설을 많이 읽지 않던 사람이라도 재밌게 참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날 <악스트>를 사가려고 했는데 입고되기 전이라 사지 못했다. 많이 아쉬웠다.)
책방을 다니면서 점점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책방의 모습은 대개 책방 주인장의 모습을 닮아 있다. 물론 책방 자체가 주인장의 모든 것을 대변하진 않지만 주인장 고유의 매력을 책방 곳곳에서 읽어낼 때가 많다. 프루스트의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홈페이지도 친절하지 않고, 책방의 위치도 불편한 구석이 있고, 책방의 의도도 단번에 해석하기 어렵지만 함부로 쉽게 해달라고 떼를 쓸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편리함 따위를 들이대면서 헤쳐서는 안 되는 귀한 가치가 숨어있는 책방 같다. 개인적인 감상이다.
팬들 사이에서 '미미 여사'라는 애칭을 얻은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에도 시대 배경 시리즈물. <그림자 밟기>와 <기이한 이야기>에 이어 <얼간이>!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현대물도 좋지만 에도 시대 배경 작품은 휴머니즘이 더욱 물씬 느껴지고 그 시대의 생활상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아, 역시 이 사람 대단한 스토리텔러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요즘 귤도 나오던데 귤 까먹으며 배 깔고 봐야지.)
동네 작은 책방 프루스트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