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건 김치전과 드문드문 퍼런 부추전, 희끗희끗한 두부구이를 사이에 두고 아들과 마주 앉았다. "동민아, 아빠가 너무너무 행복허다. 시방." 입가에 뿌듯한 웃음을 품고 있던 동민이가 허연 잇몸을 드러내며 "그려?" 하고 묻듯 대답한다.
어제는 고창고등학교에서 'AI와 데이터 과학'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특강 중에 오늘 저녁은 아들과 함께 술 한 잔 하기로 했다며 빙그레 웃었다. 좌우당간, 사십여 명이 되는 아이들이 어디선가 끌려온 듯 한 표정으로 무심히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적잖이 걱정했다. '오늘 강의가 꽤나 힘들겠군!' 싶었다. 역시나 아이들이 입고 있는 두툼한 외투도 외투거니와 천정에서 쏟아지는 포근한 바람,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어깨를 맞대고 있는 아이들은 들숨과 날숨을 나누다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역할을 바꾼 나는 두 팔을 친구 어깨에 올리라 했고 의자에 앉은 채 일렬로 늘어선 학생들은 기차가 되었다. 나는 구령을 외쳤고 아이들은 앞에 앉은 떡거머리 총각의 등을 주무르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의와 레크리에이션을 번갈아 가며 겨우겨우 강의가 끝났다. 두 시간 강의가 끝나고 남은 한 시간은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망설이는가 싶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질의응답에 참여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손을 번쩍 드는 아이가 겹치는 순간, 질문 기회를 뺏긴 아이가 '에잇' 하며 허공에 푸념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성공적인 강의가 끝나고 고창고등학교 주차장에서 광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오른편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던 사서교사 선생님이 나에게 답례품을 건네며, 오늘 고생 많으셨다고 했다. 그 유명한 고창의 명물, 복분자였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집에서 직접 담근 술인데 제가 한 병 부탁했어요. 도수가 세니 조금씩 드세요. 오늘 아드님과 술 한 잔 한다면서요. 행복한 시간 되세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맛나게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정성을 덥석 받았다. 그렇게 조수석에 선생님 마음을 싣고 광주로 냅다 달렸다. 드디어 도착한 아들 녀석 자취방. 때마침 기말고사를 마친 아들이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빠 방문에 적잖이 당황을 한 듯 성급히 박스와 배달음식 비닐을 치우고 있었다.
"동민아, 아빠 왔다. 잘 있었어."
"아빠, 조금만 늦게 들어와."
"아니야. 아빠 지금 화장실 급해. 급똥."
아들이 "으이구" 하며 막아섰던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급한 용무를 마치고 아들과 함께 아들이 다니는 학교로 이동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들이,
"아빠, 나 지금 열여섯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 잠도 안 자고."
"그려? 동민아 그러믄 안 돼. 몸 상헌다."
"응."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동민이에게 맛난 것을 사주고 싶었는데 아들은 늦은 점심을 학식으로 하겠다고 했다. 아들이 점심을 혼자 먹는 게 씁쓸했던 나는 두 번째 점심을 아들과 함께 했다. 솔찬히 맛났다. 결국 과식했다. 학생 식당이름은 '락락'이었다. 바로 앞에는 조그마한 카페가 있었다. 동민이가 숟가락을 놓으며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조금 걷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우린 카페로 향했다. 키오스크 앞에 서서 커피를 주문하는 아들에게 체크카드를 건네니 아들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속으로 '앗싸' 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밥도 사고 커피도 샀다. 아들은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다 주고 실험실로 가겠다고 했다.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마무리한다고 했다. 우린 저녁에 만나기로 했고 마트에 가기로 했다. 아들이 직접 음식을 해주겠다 했고 나는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 먹자 했다. 동민이는 나에게 걱정되냐며 레시피 찾아서 하면 된다고 했다.
저녁에 만난 우리는 광주 첨단지구 롯데마트로 갔다. 부침가루를 사고 부추를 사고 두부를 샀다. 갑자기 아들 녀석이 다이소를 들려야 한다며 몸을 외틀었다. 아들 꽁무니를 쫓아 걷던 내가,
"동민아, 뭐 살라고?"
"응, 물걸레. 나의 사리사욕을 채워야지."
동민이는 그렇게 내 체크카드를 계속 쓰고 싶어 했다. 드디어 마트 탐방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다. 아들은 조금만 기다리라며 만찬을 준비했다. 나는 방이 춥다며 투덜대기 시작했고 아들은 보일러를 틀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아들이 화장실에서 손발을 씻고 나오며 나에게,
"아빠 양심적으로다가 발은 씻지?"
"그르까? 그려야 긋지."
그렇게 깨끗이 발을 씻고 노트북을 켰다. 아들이 도마 위에 두부를 놓고 썰었다. 부추를 올려놓고 쓱쓱 썰었다. 그다음은 김치를 올리고 싹둑싹둑 잘랐다. 무심히 그 모습을 보며,
"아들아, 김치 써는 소리는 엄마랑 똑같네."
"그려? 아빠 조금만 지둘려봐요."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둔탁한 소리가 탁자 위에 만들어졌다. 프라이팬에서 접시로 김치전을 옮기며 아들이 나를 불렀다.
"아빠, 빨리 와요. 뜨거울 때 드세요."
"응. 한 번 먹어볼까?"
나는 능숙한 솜씨로 고창에서 공수해 온 복분자를 잔에 따랐다. 그리고 아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아들, 아빠 오늘 행복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아들과의 토크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