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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Sep 01. 2017

결핍과 풍요로움

자본은 어느 편일까?

다음은 내가 즐겨듣는 이완배기자의 경제이야기를 토대로 자본주의로부터 우리의 살 길을 생각해 본 글이다.


자본(쉽게 대기업으로 생각해 보자)은 노동을 제공하는 일반 대중(민중이 더 맞을 것 같다)이 잘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자본가가 아니라 굳이 자본으로 표현한 것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자본을 상징하는 한 조직에 속하는 순간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본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그 자본을 대변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애써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대기업에 소속된 임원들이면 몰라도 일반 직원들까지 자본으로 보는 것은 무리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자본을 상징하는 대기업에 소속되는 순간 누구나 그 자본의 생존논리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이면서 대중이기도 한 자신이 생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이 일반 대중이 잘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일까?


지난 박근혜정부의 경제정책을 '트리클다운(낙수효과)' 정책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정부의 정책은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트리클다운효과(낙수효과)는 양동이에서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고루 적시는 것처럼 정부의 투자 증대로 대기업과 부유층에게 혜택을 주면 궁극적으로는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에도 그 혜택이 고루 돌아가 경기가 활성화된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박근혜정부는 세금정책을 비롯해서 정책의 대부분을 대기업과 부유층 위주로 폈다. 그런데 지난 세월 보았듯이 기업에는 자금이 넘치지만 투자를 하지 않아 경제는 더욱 위축되고 일자리를 잃은 일반 대중들은 더 힘든 상황이 되었다.


지난 박근혜 정부는 일자리가 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복지가 안되어 있다보니 50대 60대 일자리는 늘고 청년일자리는 오히려 줄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자리 마저도 비정규직의 증가로 일자리의 질적 측면에서 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소득주도 성장정책은, 경기가 위축되어 사라진 저소득층의 일자리를 만들어 그들의 호주머니를 먼저 채워주면 그들이 소비를 하게 되어 기업이 만든 제품이 팔려 나가면서 기업이 투자를 하게 되고 일자리는 더 많이 생겨  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를 마련해서 먼저 저소득층이 소비를 할 돈을 채워주겠다는 것이다.  미국 대공황시절에 루즈벨트가 케인즈 이론을 바탕으로 취한 뉴딜정책이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모델이다. 정부가 공공일자리부터라도 만들어 소비를 진작시켜 기업이 활성화 되어 더 큰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를 활성화 하겠다는 정책이다.


소득주도 성장정책도 궁극적으로 자본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가령, 10억을 버는 잘사는 사람이 수입이 더 생겨도 소비와 바로 연결되지 않지만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저소득층의 수입은 바로 소비될 수 밖에 없으므로 소비가 활성화 되고 기업의 제품에 대한 판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은 이런 식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엘다샤퍼란 경제학자가 쓴 '결핍의 경제학'란 책에서 이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결핍의 경제학은 사람은 자원이 결핍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더 능률적일 수 있다는 이론에서 시작한다. 마감시간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원고를 작성하거나 숙제를 할 때 넉넉히 시간을 준다하더라도 결국 3~4일 남았을때부터 집중하여 성과를 내는 원리다. 시간이 부족해지면 생산성이 올라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결핍이 생산성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지만 이것의 부작용이 있다. 이것은 터널링효과로 설명되는데, 사람들이 터널에 갇히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오직 깜깜한 터널 속에서  오직 그 터널을 빠져나올 생각 만 하게 되면서 생각의 범위기 좁혀지는 것처럼 결핍을 겪게 되면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어 사람의 다른 생각을 막는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재정적인 결핍을 겪게 되면 오직 먹는 문제만 생각하게 되므로 다른 생각, 예를 들어 인권문제나 경제구조 등의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이 몇 푼 더 주면 거기에 매달리느라 경제구조의 문제나 보다 중요한 사람의 인권과 같은 문제 등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결핍의 경제학에서 보듯 자원의 결핍으로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면 일의 생산성이 증가할 뿐 아니라 터널링효과에 의해 다른 생각않고 자본의 말도 잘 듣게 된다. 그래서 자본은 자신이 조금 덜 벌더라도 일반 대중의 수입이 늘어 잘살게 되어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적당하게 먹고 살 만큼의 돈을 주고 자본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속에서 적응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런 자본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은 총체적인 부를 증가시키고 우리들 삶의 질을 높이는데는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본을 향한 노동의 대결 속에 숨어있는 결핍경제학이나 터널링 이론에 의해 생기는 부작용보다 더 큰 문제는 자본(돈)을 향한 경쟁 속에서 인간의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개인적이 되고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농촌풍경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늑하고 풍요롭고 평안하며 삶의 경쟁에 지친 우리들의 심심을 위로하고 품어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런데, 이 느낌은 농가소득이 높아지고 농촌이 잘 살게 된 후에 갖게 된 느낌이 아니라, 훨씬 이전 내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부터 갖던 느낌이다. 다시 말해 전쟁 후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리던 결핍이 일상이던 시대의 농촌 모습에  더 어울리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젊은 분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는 도시 농촌할 것 없이 모두들 가난했다. 한국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4년 국민소득이 104달러이고 10년도 더 지난 1977년에서야  1000달러를 넘어 지금의 1/30쯤 되는 경제수준이었으니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못사는 가운데서 넘쳐 흐르던 우리들의 농촌 인심과 공동체의식은 가난하고 힘들때는 자신들 만의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다는 그  터널링효과 이론으로는 설명이 잘 안된다.


자신의 가족이 먹고사는 데에만 온 관심이 집중되던 그 시대에도 우리 농촌에는 어른을 공경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지금보다 그 당시의 농촌에 더 끈끈한 공동체의 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포천에서 자란 지인의 글에서 이웃간의 정을 확인할 수 있다.


".....동네 인심도 후하고 어른들은 비교적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어른들이 논밭에서 일하다 참이나 점심을 드실 때, 아이들이 지나가면 불러서 밥을 먹이곤 하였고, 아이들이 과일이나 참외, 수박, 콩, 밀서리를 해도 지나치지 않으면 모른 척 했다. 반면에 아이들이 서로 싸움을 하거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즉석에서 야단을 치거나, 저녁 무렵 집에 찾아와 부모님께 말을 전하여 훈육토록 했다....(작은기쁨, 서재원)"


그때는 한 마을이 공동체였다. 마을 자녀들은 그 공동체 부모 모두의 자녀들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친척의 젖을 얻어먹고 자란 아이들도 있었다. 어찌 보면 마을 전체가 공동육아를 했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런 농촌의 옛날 모습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집중해야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이웃을 살피고 자녀들을 돌보고 먹을 것을 나누는 관습은 결핍의 경제학과 터널링 효과 이론으로는 도대체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아마도 지금처럼 부의 편중이 심하지 않았고, 자본(돈)에 대한 일반 대중의 경쟁이 본격화 되지 않아 공동체성이 잘 유지되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도시마을 공동체든 농촌 마을 공동체든 마을공동체성 유지되면 나의 자녀 너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의 자녀가 되고, 나의 집 너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아무리 우리 대중을 갈라 삭막한 세상을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성격에 따라 앞으로도 낙수효과 정책이든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든 펴 나갈 것이다.

어떤 정책으로 다가오더라도 자본에 의해 대중이 분열되어 이웃이 경쟁 상대로 변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그것이야말로 자본에 의한 진정한 패배가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붕괴는 자원의 결핍이 아니라 자원이 풍부한 상태에서 오히려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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