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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Jan 02. 2018

인도기행2, 부처를 만나다

샤르나트 박물관과 녹야원 방문기

델리 국내선 공항에서 샤르나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아내와 좌석번호가 달라 앞뒤로 따로 앉게 되었다. 좌석이 없었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타서보니 일행 모두 갈라놓은 좌석배치를 하는 바람에 서로 자리를 재조정한다고 한참동안 법석을 떨어야 했다. 한국 같으면 어떻게 하든지 일행끼리 앉도록 배려해줄텐데 왜 그랬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으로 이들에게는 그런게 문제가 되는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의 4대성지 샤르나트로 가다.


바라나시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샤르나트로 향했다.  샤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10키로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곳으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곳으로 불교 4대 성지중 하나라고 한다. 


불교의 4대성지는 석가가 탄생한 곳(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곳(부디가야), 열반에 드신 곳(쿠시나가라)과 처음 설법한 곳인 이곳 샤르나트를 말한다. 

불교 4대성지, 인터넷자료


가는 동안 가이드가 전형적인 인도의 도심모습이라고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도심 전체가 마치 재개발에 휩싸여 있는듯 부수고 허물고 있는데다가 소와 개, 염소들이 도로를 마음껏 활보하며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오토릭샤(삼륜자동차), 일반버스, 승용차, 택시 등이 뒤엉켜 저마다 먼저 가려고 크략숑을 울려대는 바람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길 옆의 가로수들은 녹색에서 먼지로 덮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먼지로 덮힌 도로변 나무들


샤르나트박물관은 입구에서부터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모든 소지품을 맡겨놓고 가야해서 눈으로만 석가모니의 유물을 담는데 만족해야 했다.


석가가 불교를 일으킨 후 인도지역에 불교가 융성한데에는 이 나라의 최고의 왕으로 추앙받는 마우리아왕조 3대 아소카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소카왕은 인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서쪽 파키스탄 너머 현재 아프카니스탄까지 정복한 뒤 여세를 몰아 인도남부의 칼링가 국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백성은 전염병과 굶주림에 죽거나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서 무력을 통한 전쟁의 비참함을 깨닫게 되면서 불교를 통해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을 세우게 된다. 이후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불경을 모아 경전을 정리하고, 주요도시에는 돌기둥을 세워 불교신앙을 새겨 놓도록 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아소카 석주(돌기둥)다.

아소카왕 석주, 인터넷자료

그래서인지 박물관에는 아소카왕의 유적물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이끌고 커다란 글자판 앞으로 데려갔다. 그 유적물은 아소카왕이 우리 한국의 세종대왕처럼 힌두문자를 발명한 분이라며 아소카왕 때 만든 힌두문자를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자가 왕조별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이었다.


그리고 아소카왕의 치적을 과시하는 아소카 석주의 웅장한 모습, 기둥 머리부분의 사자 4마리와 그 아래 수레바퀴모양의 차크라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차크라는 24개의 바퀴살로 만들어져 있으며 시간을 의미한다고 했다. 기둥부분은 다음에 방문할 녹야원에 따로 비치되어 있다고 했다. 


불교의 만자 모양(나치들의 깃발 형태)의 형상에 관한 설명도 있었는데, 원래 만자 모양은 오른쪽 방향으로 만들어져 시계방향이어야 하는데 한국의 절에 있는 만자 모양은 왼쪽 방향으로 되어 있다면서 소위 짝퉁 만자 모양이라고 했다. 


중앙의 아쇼카 왕의 전시물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불교관이 오른쪽에는 힌두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먼저 불교관에서 처음으로 설명한 조각은 여성보살조각이었는데 부처에게 식사를 제공한 보살이었다고 한다. 내심으로 그런 일을 한 보살로 보기에는 가슴 등이 너무 육감적이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부처가 식사하는 모습, 부처가 명상하는 모습, 부처가 설법하는 모습 등 5세기경에 만들어진 많은 불교 조각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힌두관 중앙에는 힌두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파괴의 신 쉬바신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양쪽에는 에는 다양한 힌두 신들의 모습과 힌두교에서 숭배하는 코끼리, 원숭이 등의 동물들의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1500에서 2500여 년 전의 유물을 너무나 허술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진열되어 있는 유물이 진품이냐는 일행 중 한 명의 질문에 모두 진품이란 사실에 놀라고 또한 허술한 잠금장치와 심지어 전시공간에서 유물을 꺼내어서 촬영을 하고 있던 광경을 보면서 또 놀랐는데 여행이 거듭되면서 그 이유가 드러났다. 이 나라에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곳이 32 곳(우리나라 12곳, 인도는 국력으로 등록하지 못한 곳이 많을 것으로 추정-개인 생각)이나 되고 곳곳에 이런 유물들이 널려 있어 관광객들이 쉽게 만질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걸터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도 많았다. 그 만큼 관광자원이 널려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다음 이동한 곳은 녹야원.

입구를 들어서자 확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녹야원 전경


넓은 터 중간에는 빨간 벽돌모양의 남은터가 2500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었는데 그곳이 석가가 성도한 후 다섯 제자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전한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큰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뭉퉁하게 생긴 탑이 멀치감치 자리잡고 있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제자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앞으로 무엇을 붙잡고 기도를 해야 하나라고 하니 부처는 들고 있는 밥그릇을 엎어 보이면서 이게 바로 부처다 라고 했던 연유에서 이런 모양의 탑이 탄생했다고 한다.


밥그릇 모양의 불탑


사실 지금 한국절에 있는 본당에 자리잡고 있는 부처님 형상은 모두 원래 석가모니의 의도와는 달리 세워진 숭배물이라 보면 된다. 한국, 중국, 일본으로 퍼진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교인 소승불교가 아니라 굽타왕조의 카니슈카왕때 보다 많은 중생들의 구제를 위해 창안된 대승불교의 형상물로 전파된 것이다. 기독교의 예수도 그렇고 불교의 석가도 그렇고 종교의 창시자는 어떤 형상을 모셔놓고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들이 편의상의 형상물을 만들어 놓고 신성화해 온 결과로 탄생한 것들이 바로 이런 조각물로 나타난 것이다.

녹야원 내 사슴농장


한참 더 걸어가니 사슴 농장 같은 곳이 나타났다. 

이 농장에 있는 사슴들이야 말고 2500년 전부터 있어왔다면서 당시부터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온 사슴의 후손들이라고 했다. 아, 그래서 녹야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보았던 아소카석주의 아래 기둥부분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보면서 이 기둥 위쪽에 사자모양의 석두와 사크라가 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가 문장으로 채택되어 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부처님을 상징한다는 커다란 밥그룻 모양의 불교 건축물 옆에는 자이나교 사원이 덩그러니 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인도의 종교들은 각자 그 나름대로의 영역을 서로 인정하면서 발달해 왔다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이나교 사원


인도에서 부처는 힌두교 3대 신중 비슈누 신의 한 아바타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도 힌두교 범주내에 있다고 본다고 했다. 싯다르타는 인도의 조그만 국가의 왕자로 처음에는 힌두교를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어 불교를 창시한 것이니 같은 뿌리라고 보는 것이란 해석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불교와 힌두교 차이점은 뭔가요?란 질문에 가이드는 "여기 인도사람들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나와 아내는 인도에 오기 전에 토론을 통해서 나름대로 두 종교의 서로 다른 점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힌두교는 신이 있는 종교이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은 점과 윤회의 개념에서도 자아개념의 존재여부 등의 차이점이 있다는게 우리가 정리했던 부분이지만 인도인들이 보기에는 불교의 부처는 그들 힌두교에 소속되어 있는 한 분파로 여기는 것이다. 


인도 국민들이 믿고 있는 신의 숫자가 3억 3천이나 될 정도로 신이 많다는 얘기는 모두 자신만의 신을 가지고 있음을 얘기한다. 그러니 우리들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신은 아마도 그 범주 속에 들어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사실 유일신을 믿는다는 카톨릭, 이슬람, 개신교, 유대교는 동일한 하나님을 믿지만 다른 종교로 여겨지고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는 개신교를 믿든 사람들도 자신들의 믿는 하나님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형태들이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다른 것을 보면 그들의 신앙관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힌두교의 경전이라는 리그베다에 대한 강의도 몇 편 들었지만 들을때는 그런가 했지만 이해하기가 만만찮았다. 김상근교수의 마하바라타, 류경희교수의 바가바드기타, 강성용교수의 우파니샤드 등인데 듣고도 한마디로 뭐라하기 어려웠었는데,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지식(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소화할 정도면 깊고도 넓은 대화를 할 능력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음)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채사장의 '열한 계단'에서 나름대로의 정의를 할 수 있었다. 


범아일여, 인터넷자료


채사장의 열한 계단은 개인의 삶을 통해 성장하는 계기가 된 책들을 소개한 책인데, 톨스토이 부활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의 성경에서 불교로 그리고 철학으로 철학에서 과학으로 ... 이렇게 깨달으면서 성장해 가는 그의 현재 삶의 마지막 계단(현재 기준임. 작가는 앞으로 또 어떤 계단의 밟으면서 성장할 지는 모름)인 열한 단계에서 그는 '우파니샤드'를 만난 얘기를 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방대한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의 핵심 메시지가 적혀있는 책이다. 우파니샤드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범아일여 사상, 즉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梵)과 개인의 본체인 나(我)가 하나라는 사상이다. 이런 범아일여 사상의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에게 있어 신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각자의 신을 갖는 그들의 생각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주인공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평소 나의 주장을 힌두교의 정수에서 발견한 기쁨이 나의 인도 여정에 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만물은 항상 돌고 돌아 일체만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가니라. 단지 이러한 집착이 모이고 모여서 고苦가 나타나는 것이므로 고를 면하려면 고의 원인이 되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다."  부처의 한 말씀을 끝으로 사르나트의 방문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샤르나트 박물관 앞의 인도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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