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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Jan 06. 2018

인도기행5, 숨겨진 오르차성

숨겨져 있어 더욱 아름다운 곳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르차 성으로 이동하였다. 


버스로 4시간 반을 가는 거리인데  160키로 정도 된다고 한다. 고속도로라고는 하지만 우리처럼 전용차로가 아니라 사람들은 물론 소, 개, 염소들도 좌우에 돌아다니는 고속도로이다보니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다.


도로사정도 좋지 않아  수시로 덜컹거린다. 그리고 차 한 대만 이동할 수 있는 도로도 많아 비켜가기 위해서는 노변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도로 주변의 인도를 천천히 살펴보기에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소떼와 염소떼 그리고 개들을 보는 것에는 익숙해졌지만, 상대적으로 빠른 도로이다 보니 가끔 로드킬 되어있는 동물들도 보였다. 그리고 멧돼지 처럼 생긴 돼지들도 도로주변을 마음껏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 볼일을 보는 모습이라고한다. 우리들은 급할 때 소변 정도는 자연에서 실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큰 볼일도 자연에서 그냥 해결한단다. 곁에 있는 동물들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이상하기 보다는 같은 생물체의 하나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들도 물동이 머리 위에 하나씩 들고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같은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서라 한다. 용변을 보다의 영어표현 'Nature Calls'가 떠올랐다. 


소* 무더기


그리고 집집마다 무더기가 쌓여있는 모습이 보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소똥을 벽돌처럼 쌓아놓은 것이라 했다. 그것으로 지붕도 만들고, 그것으로 벌레도 쫓을 수 있어 아주 긴요하게 사용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소들이 우유를 제공해서 어머니로서 신성시되는 이유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유채꽃


지금 이곳은 우리나라 제주의 봄처럼 노란 유채꽃이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음식에 유채기름을 사용하므로 유채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한다. 간간히 보이는 유채밭 외에는 거대한 다른 나라처럼 광활한 들판이 펼쳐지는 모습을 발견하긴 어려웠고 정비되지 않는 소규모의 농사를 짓는듯한 들쭉 날쭉한 들판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멀어져 갔다. 차생산은 세계 1위, 밀은 2위, 쌀은 4위일 정도의 농업국가로서의 인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생각은 아그라에서 자이푸르와 델리로 갈때 생각이 달라졌다. 넓게 펼쳐진 평야와 같은 지역들이 많이 보였었다)



오르차성으로 가기 전에 2시간 정도 가서 휴게실에서 잠시 휴식을 갖고 다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지금까지 관광에 사용된 20-30인용 버스에 모두 운전사 뿐 아니라 보조운전자가 있어 운전사가 오른쪽을 살피는 동안 보조운전사는 왼쪽을 살피면서 주운전사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둘과 승객 사이에는 마치 비행기의 조종석과 분리한 것처럼 밀폐된 유리로 운전공간을 보호하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우리나라도 본받아야할 사항이라 생각했다. 보조운전자는 정차시마다 승객들의 승하차를 도와주고 호텔에 도착하면 짐을 싣고 부리는 일을 도와 주었다. 또한 운전공간 중간에는 인도의 힌두신인 가네다와 시바신등의 형상을 가진 조그마한 신전을 모시고 있었고 아침에는 진한 향을 피워 우리 일행들을 당황케 했다.


오르차성에 가까와오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일반도로에 사람만 통과시키고 버스는 우회시키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중교통이나 관광버스가 우선이 되어야 할텐데, 여기서는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는 비포장도로로 우회하라니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들은 별 저항없이 버스를 돌린다. 우회도로로 가는 길을 쉽지 않았다. 비포장도로일 뿐 아니라 아예 차량 두대가 비켜가기가 어려운 도로였다. 앞에서 자동차가 오면 후진을 하거나 좌우측으로 나있는 나무가지를 스치면서 겨우 교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꾸역꾸역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조수석의 운전보조자가 내려서는 긴 막대기를 구해 오더니 버스 위에 닿을 것 같은 전선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는 동안 버스가 이동할 수 있었다. 가이드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곳엔 3종류의 길이 있는데, 나쁜길 아주 나쁜길 그리고 만드는 길이라고 했는데 실제 만드는 길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오르차성은 무굴제국시대의 성이다. 이제부터는 델리까지 관광하기 위해서는 무굴제국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크게 보면 2번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제국에 의한 지배와 근대 영국에 의한 지배가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한 36년 정도이지만 이 나라는 무굴제국을 포함한 이슬람 제국에 의한 지배를 650여년, 영국 100여 년이니 합쳐 700년이 넘는 동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일본과 같은 지배를 받은 것은 영국지배기간이고 이슬람으로부터의 지배는 지배라기 보다는 우리나라도 역사 내내 중국의 지배와 영향력 하에 있었던 정도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무굴제국, 인터넷자료


이슬람의 인도 침략은 무굴제국이 처음이 아니라 10세기 경부터 본격적인 동진이 시작되어 12세기에 델리에 토착화 하여 정착하지만 절대적인 왕국을 확립하지 못하고 2백년 사이에 5개 왕조가 교체되는 상태에서 몽골로부터 온 새로운 이슬람 세력이 등장하여 이슬람끼리의 전쟁으로 무굴제국이 승리하여 16세기부터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무굴제국의 첫 번째가 '바부르'왕이고 그 아들이 '후마윤'인데 일찍 죽는 바람에 무굴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된 3대 '악바르'가 13대때 취임하여 영토를 더욱 넓히고 유화정책을 펴게된다. 그리고 4대가 '자항기르', 5대가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이고, 6대가 '아우랑제브'이다. 어느 나라나 왕권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기 마련인데, 무굴제국도 4대 자항기르, 5대 샤자한, 6대 아우랑제브 모두 반역에 의해서 형제들을 모두 죽이거나 아버지를 가두고 황제자리를 찬탈하게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이드에 의하면 악바르는 붉은 사암벽, 샤자한은 대리석, 자항기르는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건축물의 특징만 보면 어느 황제 시대의 건축물인지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무굴제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3대 악바르 황제의 점령지역에 대한 종교포용정책이었는데 그 정책이 잘 이어져 오다가 5대 샤자한이 타지마할을 지으면서 재정적 어려움이 닥치고 그 뒤를 반역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아우랑제브는 기존의 정책을 바꿔 세금정책등 타종교탄압정책으로 바꾸게 된다. 아우랑제브의 이슬람 절대주의 정책으로 인해 힌두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들 특히, 시크교 동맹의 결성으로 나라가 분열되고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무굴제국은 통제력을 잃게 된다. 


오르차, 인터넷자료


오르차는 숨은장소라는 뜻으로 한 때 분델라 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르차성은 이슬람이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 시대의 궁전이 모여있는 곳으로 큰 강에 둘러쌓여 있었다. 이곳이 가장 번성한 시기는 비르 싱 데오라는 왕이 지배할 때인데, 이 사람은 무굴제국의 3대왕 악바르의 아들 자항기르가 아버지의 눈에 벗어나 있을때 황제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 지역의 왕으로 있었던 사람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한명회 같은 사람이 세조가 왕이 되도록 공을 세워 지방의 왕권을 보장 받은 경우라 하겠다.


라자마할


처음 방문한 라자마할은, 라자는 왕이고 마할은 궁전을 의미한다. 라자마할은 550년 전에 비르 싱 데오의 충복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궁전은 일반인을 만나는 공간과 왕족을 비롯한 신하를 만나는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건축물은 힌두식으로 건립되었으며 건축물 천정과 벽면에는 다양한 무늬와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다. 특히 라마신화의 그림을 소재로한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궁전건축물 꼭대기까지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고 라자마할 옆에 있는, 지금은 호텔로 쓰고 있는 시즈마할을 자나 자항기르 마할로 이동했다.


자항기르마할은 라자마할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자항기르 마할은 비르 싱 데오가 자항기르 황제를 위해 건립한 마할로 중간에 분수를 포함한 연못과 더불어 5층으로 된 궁전은 방이 132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항기르 마할


궁전에서 여러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멀리 보이는 멋진 건물은 어떤 마할이냐고 했더니 사원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신기하고 멋져 보이는 건물이 있으면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궁전은 한 곳에 모여있었지만 사원은 흩어져 있어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렇게 궁전을 구경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이동했는데 그곳 역시 **마할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곳이었다. 식사는 지금까지 호텔에서 한 인도식사와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뷔페식이 아니라 종업원이 서비스 하는 식사였다.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서빙하는 식사를 하다보니 정말 궁전을 방문한 손님이 된 기분이다. 여러 번 인도음식을 먹고 있지만 물리지 않고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하다.


레스토랑 마할


식사후 레스토랑 궁전을 구경도 못하고 가이드의 급한 목소리를 따라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아그라를 가기 위해 잔시역에서 특급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40분에서 50분 걸리는 거리지만 기차가 연착할지도 모르고 우리가 가는 동안 버스가 밀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해는 되지만 너무 서둔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서둔 것이 잘된 일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열차가 몇 시간씩 연착하는 것은 예사라 한다. 그런에 이날은 열차의 연착 소식도 들리지 않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올때 버스를 우회시킬 정도로 오르차 성 주변 사원을 방문하러온 방문객들로 인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밝고 활기찬 가이드의 말소리가 점점 줄면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잔시역


그렇게 가슴 조이며 열차 출발시간 15분 전쯤 잔시역에 도착했는데 도착하는 순간 마치 피난행렬 속을 이동하듯 열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앞에 가득 메운 탈것들을 비롯해서 짐을 실어나르는 사람들, 열차 굉음에 플랫폼을 가득 메운 사람들로 인해 가이드의 높이 든 손만 보며 서둘렀다. 열차를 타는데도 가방검사가 있어 가방검사를 마치고 다시 플랫폼 계단을 이동하여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플랫폼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열차를 타기 전에는 불안함이 여전했으나 가이드만 믿고 열차 오기를 기다렸다. 자유여행하는 분들은 열차를 타면서 상당한 스릴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열차를 탄 후에도 안내 방송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스릴감이 클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인도열차, 인터넷자료


Indian Railway라고 큼직하게 쓰여진 열차가 우리 앞으로 스쳐 들어왔다. 열차의 겉모습이 엄청나게 낡은 열차처럼 보였다. 내부는 어떨까? 큰 짐을 가지고 열차에 올라 좌석을 찾고 머리 위에 짐을 얹느라 혼란스런 시간을 보내고 자리에 앉고 보니 생각보다 안락한 열차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둘이 앉은 자리는 중간에 탁자가 놓인채 6명이 마주보는 자리다. 4명이 앉았는데 앞에는 인도청년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인도열차 하면 피난갈 때 처럼 동물들까지 함께 타고 열차위 옆에 매달려 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 그런지 의외의 안락한 열차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 열차가 특급열차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시역 주변 간디동상


사실, 잔시역은 세포이반란이라 해서 영국지배 시절에 용병들의 반란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는 그런 곳의 유적을 보나했었는데 일정에 없었던 것이었다.  도로 로터리에 잔시역을 바삐 들어오면서 간디를 앞세운 행렬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무저항 비폭력을 외쳤던 이 나라 가장 존경을 받는 분의 동상이 폭력으로 항쟁했던 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차 탁자는 아주 넓어 기행문 정리하기에는 딱이었다. 기행문을 쓰는 동안 앞에 앉은 꼬마녀석이 아빠에게 내가 뭘하는지 물어보고 아빠는 뭔가 대답한다. 그리고 승무원이 너덜너덜한 종이로 된 표를 가지고 승차를 확인한다고 다니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일찌감치 없어진 풍경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우리처럼 열차 통로를 오가면서 맥주나 간단한 안주 그리고 과자등을 이동 판매점은 없었다. 대신 주전자나 큰 통을 든 분이 짜이를 외치며 다니고 있었다.


열차는 생각보다 편안했다. 깨끗하진 않았지만 자리도 넓고 안락했다. 그리고 창과 창사이에는 콘센트가 설치되어 있어 충전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여행시간이 긴 여행이 많아서인지 머리 위의 짐 놓는 곳이 특히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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