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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Apr 07. 2018

'을'을 즐긴 친구 이야기

관계의 진수를 알게되다



우리들의 갖는 직업 중 갑 중 갑이라 할 만한 직업이라 하면 어떤 직업을 들 수 있을까?


정치계나 법조계, 교육계, 의료계와 같이 국가자격증을 갖는 직업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법조계나 교육계 의료계 등에도 이제는 고객 중심 마인드가 정착되면서 과거처럼 갑 입장에서의 영화를 누리기가 예전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정치계와 또 한 곳, 언론계는  굳건하게 갑의 입장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장 빠르게 사회의 상위층과 교감할 수 있는, 즉 지위 상승효과가 높은 방법을 들어 보라면 단연코 언론 계통의 직장에 들어가거나 기업의 노동조합 간부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든 직업의 신분상승효과가 빠른 것은 업무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 정치부 기자들은 자연스레 정치권 인사들을 만날 수 밖에 없고 노동조합 간부들도 기업의 최고책임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간부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는 않다. 조합원의 투표를 거쳐 전체 조합원 중 몇 명만 그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사회적 직위 상승은 꾀할 수 있지만 이들의 위치가 갑의 위치라고 보긴 어렵다. 어쩌면 조합원들 앞에서는 을의 입장이 된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반면, 언론계통 종사자들은 다르다. 상위 몇 개의 신문사나 방송사는 들어가기 쉽지 않지만 전국으로 보면 일간지 만도 383개(2015년기준)나 있다. 이렇게 많은 일간지가 전국에서 발행되고 한 곳에 10명 만 하더라도 약 4천 명의 기자들이 있는 셈이다. 상위권 일간지를 빼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언론계에서 일할 수 있고  중앙 정부,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지방자치단체와 중소기업 등에서 높은 위치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고 그들에게 갑의 위치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게는 이런 갑 중에서 갑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이나 방송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이 친구들 역시 60이 가까와지는 나이들이라 은퇴를 했거나 한직으로 밀려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다. 그 친구 중 한 명을 만났다.


그 친구는 정치부, 편집부, 문화부 등을 거쳐 논설위원을 하다가 작년까지는 영업국에서 일했다. 이 친구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앙지 기자로 근무하면서 활동하는 얘기들을 듣노라면 일찌감치 우리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매스컴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분들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그 분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곁들어 말하는 모습에서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는 평소에도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답지 않고 겸손하고 예의바른 친구이긴 하지만 그날 뜻 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라는 직업에 있다보면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갑'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어.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퇴임을 할 텐데 이런 기자 생활만 하다가 사회에 나가는 것 보다는 '을' 역할을 해보고 나가는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영업국에서 일하게 된게 좋은 기회가 되었어."


그 친구가 영업국으로 발령났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냥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그 친구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알다시피 언론사에서 그것도 주류 언론사가 아닌 곳에서 영업국을 맡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을의 역할을 맡는 셈이 된다. 대부분의 일이 을의 입장에서 아쉬운 소리와 부탁을 해야하는 입장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업을 잘 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도 많이 했지만, 막상 닥치니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할때도 있었고 상대로부터 모멸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 기간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소중한 자산을 갖추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한때 벤처붐이 일었을 때가 있었다. 기업에서 아이디어 많고 똑똑한 친구들 가운데는 그 흐름을 타고 나가 엄청난 부를 이룬 분들이 있다. 이때 기자들 가운데서도 안정된 기자생활을 접고 벤처를 설립하여 사업을 시작한 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실패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비즈니즈 모델이나 투자자의 문제라기 보다는 회사를 나오는 순간 갑에서 을의 입장으로 바뀌면서 생기는 현상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인터넷 이미지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파는 것이 인간이다'에서 대부분 인간은 무엇을 팔고 있다고 했다. 형태만 다를 뿐 뭔가를 팔면서 살아가는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매도 있지만, 특정한 무언가(설득)로 돈이든 시간이든 상대가 자신의 자원을 나에게 배분하도록 하는 일은 모두 세일즈를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가령, 남녀가 만나 서로가 좋아지는 과정도 서로에게 '매력'이란 상품을 판매해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영어로는 SELL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보다 실질적인 판매가 이루어지는 영업현장에서 근무를 한다는 것은 인간 삶의 핵심을 가장 빨리 실질적으로 배우는 셈이다. 현장에서 제대로된 영업을 해본 사람이 기업에서도 중용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바로 '관계'임을 간파한 이유일 것이다. 


이 친구는 최근에 경영전략 부서에 발령이 났다. 

이 회사의 경영전략부서는 예산과 인원을 가지고 있는 부서라 일반회사 경영전략부서라면 갑의 위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문사의 경영전략부서는 또 다른 내부 고객을 만족시켜야 하는 을의 부서다. 신문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자들과 논설위원의 요구와 노동조합 구성원들과의 협상을 하는 등 회사 살림살이를 챙겨야 하는 만만찮은 업무다. 마치 대학에서 교수들의 요구들을 반영해야 하는 행정지원 부서의 역할을 하는 것일게다.


정년을 얼마 앞에 두고 맡은 보직으로서는 쉽지 않는 보직임에 틀림없다. 이 친구의 말대로 갑으로만 살 수 있던 세계에서 을로 사는 일을 택했던 것이 회사에서 오히려 중요한 업무를 맡기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갑으로 근무하다 은퇴하는 것보다 을의 역할을 해봄으로써 관계훈련을 더 많이 하게 되었고 그것이  남들은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에 더욱 소중한 업무를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싶다.


새로운 자리에서 또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갈 친구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며, 은퇴 후에도 함께 세상을 공부하며 대화를 나눌 그 날을 소망해 본다.


인터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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