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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Jun 02. 2018

부모의 장수와 슬픔

부모님, 오래 오래 사세요....

첫 직장 생활을 같이 시작한 입사 동기 셋과 반주를 곁들이며 저녁을 같이 했다.

50대 후반의 우리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답이 없는 공통 주제에 이르렀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연로하신 부모나 혼자되신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들 모두 자식들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점도 같았다.


나의 부모님은 20여년 전, 60대 초반에 다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사고로 먼저 돌아가시고 어머님도 몇 년 뒤에 쓰러져 고협압 당뇨 치매까지 앓으시다 돌아가셨다. 나의 부모님도 생존해 계셨다면 그날 만난 친구들과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많은 공감의 시간이 되었다.


과거에는(나의 부모님이 쓰러졌을때만 해도) 부모님에 대한 봉양 책임은 장남에게 있었다. 지금 친구들 사정을 생각하면 참 고맙게도 나의 아내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을 서울로 모시려고 했으나 서울생활을 원치 았았던 어머님이 혼자 사시다가 거주하던 집의 화재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오시게 되었는데, 그렇게 함께 사는 것을 우리는 의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랄 때만 하더라도 장남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잘된다며 부모님들은 장남을 더 챙겼다. 우리 집에서도 나는 모르지만 아래 세 동생들은 그런 부모에 대해 느끼는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남을 챙긴 것은 장남이 제사도 지내고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 이미지


그러나 급격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핵가족 시대로 접어들었고 자녀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은 시대가 되면서 장남 개념이 사라졌다. 또한 양성 평등이 강조되면서 여성들의 시댁에 대한 의무감도 점차 줄어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 결과로 요즘에는 사위뿐 아니라 며느리도 백년손님이 된 것 같다.


나를 비롯한 지금 세대들은 과거처럼 자녀들의 부양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부부가 백년 해로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그렇게 살다 같이 세상을 뜰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 혼자 살게 되더라도 자녀의 신세를 지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사위든 며느리든 모두 손님일뿐 함께 살 수 있는 가족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돌보는 요양원과 같은 시설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일 게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이미지


그런데, 과도기에 살았던 우리 부모들이 문제다. 우리 부모들은 당신들의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자녀에게 올인한 마지막 세대로 남을 것이다. 당신들이 나이 들어 봉양 받아야 할 시점에 그들의 자녀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들의 자녀 중 아무도 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 자녀 부부가 자신들의 부모를 모신다는 합의에 이르기 힘든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다르게 표현하면 장남이 혹은 그의 며느리가 부모봉양을 의무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5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르면 집안 권력(?)도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의사결정이 어렵게 된다. 또한, 형제자매간 서열 구분이 없어지면서 많은 가정이 자녀들 간의 봉양 책임 떠넘기기로 인해 가족 불화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날 만난 친구들은 모두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타지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의 아내들은 우리 친구들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이것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 가족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 공감대가 없이 떨어져 살면서 배우자의 부모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고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무리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친구들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 만이라도 부모 집에 같이 살면서 후회 없는 보살핌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계 때문에 쉽지 않고 그들의 아내와 떨어져 사는 불편하고 어색함을 각오(?)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인터넷 이미지


그래서 그 친구들이 하는 일은 가끔 먼 거리에 계시는 부(모)를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얼굴 보고 오는 것이 전부다. 함께 있다 떠날 때면 겉으로는 잘 올라가라는 인사를 하면서도 언젠가부터 어린아이의 불안한 눈빛이 되어 아쉬워하는 당신들을 뿌리치고 서울로 와서는 금세 생계에 묻혀 잊어버리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며 걱정을 하는 일을 반복한다고 한다. 


급격한 가치 변화를 겪은 현재 50대 후반의 우리 세대들을 힘들게 키워온 우리들의 부모는 장수가 축복이 아닌 시대에 사는 셈이다.


가고 나면 무시로 그리워지겠지만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우리들의 부모 모습을 생각하면 늙고 병든 초췌한 수사자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인터넷 검색 이미지


친구 부모들의 건강을 빌며 대책 없고 하릴없이 우리 부모들의 아픔을 새겨본다. 


그리고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인생도 결국은 혼자 쓸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빨리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자세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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