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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Sep 11. 2020

하마트면 남자답게 살 뻔 했다.

점점 나답게 살 수 있어 다행이다.

"짜식아, 남자가 그래서 되겠니?, 남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해!, 남자ㅅㄲ가 그것도 못해?,"

살면서 내가 들어온 얘기들이다.


태어날때부터 남성과 여성성이 분명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생물학적 외형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 성소수자로 살아야 하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다. 나는 다행히(?) 성정체성 측면에서는 성다수에 속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나를 들여다 보면 남성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릴적 찍은 사진을 봐도 그렇고, 커 가면서 문득 문득 드러나는 나의 태도에서 여성적인 면이 많이 발견된다.  


"사진 속에 있는 **님의 포즈가 여성스러워요...."

직장에 있을때, 가족 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보던 직원이 두 손과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나를 보며 한 말이다. 그 후로 사진을 찍을때면 의식적으로 다리도 벌리고 어깨도 펴고 해보지만 어색하다. 나답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에도 철봉, 씨름, 축구 등 거의 모든 남성다움이 비교되는 운동 시간이 싫었다. 잘 안맞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다움 속에 어울리기 위해 오버하면서 술도 먹기도 하고, 억지로 담배도 피울려고 해봤다. 그리고 어색한 욕찌꺼리도 내 뱉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모두 나다운 것과는 거리가 먼 행위들인데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압력을 느껴  어쩔 수 없이 했던 것 같다.


"우리 대다수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부모님, 사회체제, 연장자, 권위 또는 전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에이브러햄 매슬로우)."


이처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그 사회 일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잣대에 맞춰 적응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역할 잣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잣대에 더 부합하는 사람일수록 사회 적응에 유리하게 때문에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왜 그런 잣대가 생겼는지에 대한 의심은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므로 그냥 적응하면서 살아 간다. 사실 그랬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이 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져 왔음을 알게된다.


남자가 술과 담배는 할 줄 알아야지...(지금 기준에서 보면 턱도 없는 얘기다)

무겁고 위험한 일은 남자가 해야지...(지금 기준에서 보면 힘이 더 세고 용기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

남자가 여성을 보호해야지...(지금 기준에서 보면 서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기준'이란 것은 뭐고, '과거 기준'이란 것은 뭔가?


원시농경사회를 생각해 보면 육체적인 '힘'이 모든 우월적 지위의 기준임을 알 수 있다(지금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면이 있다). 그때는 동물집단사회와 비슷했을 것이다. 동물사회에서는 아프거나 힘이 없으면 힘이 있는 동물이나 다수의 희생양이 된다. 그처럼 인간들도 자연스럽게 생물학적으로 힘이 더 센 남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여성은 종족을 유지하는 기능과 남성의  악세서리로 살아왔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사실, 사람도 동물이다. 동물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은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가장 다른 점이 뭘까?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웃을줄 알고, 말하고 쓸 줄 아는 능력일테지만, 현 시점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가장 합리적인 구분 잣대는 소수에 속한 쪽에 대한 다수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가 될수록 태어난 그대로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인정되는 쪽으로 바뀌는 것 같다. 남성이지만 여성답게 태어날 수도 있고, 여성이지만 남성답게 태어날 수도 있다(남성답다, 여성답다는 말부터 사라져야 할테다.) 여성답게 태어난 남성이 억지로 남성답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비극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회는 여전히 다수가 속한 쪽의 입장으로 소수를 바라보고 판단한다. 남성답지 못하다 여성답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훈계한다. 어찌보면 다수의 횡포인 셈이다. 내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소수에 속하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다수의 횡포일 뿐 아니라 동물사회로 돌아 가겠다는 얘기다.


여전히 아쉬운 면이 있지만 점점 더 태어난 특성 그 자체를 존중해 주는 사회로 변하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무리 바뀌었다 하더라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나답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위의 삶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남자답게 살아야 하는데서 벗어나 나답게 살면 되는 사회가 온것 같아 좋다. 나는 한참 살고 난 뒤에 그 기쁨을 누리지만, 우리 후배들은 혹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나답게 사는 삶을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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