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희 Feb 16. 2022

갑작스레 떠난 친구를 기리며...

의미있는 삶을 생각한다.

3개월째 깨어나지 못하던 친구가 1월 26일 저녁에 세상을 떠났다.

마치 예감한 듯, 그날 낮에 친구의 안부를 물었던  답 없는 문자 메시지만 덩그러니 눈 앞을 스친다. 고교친구들에게 부음을 전하며 함께 오열했다....


나와 아내는 이미 각 부모님 나이를 더 살고 있지만, 우리 나이에 세상을 버리면 '요절'로 생각될 만큼 수명이 길어졌다. 우리 친구들도 이미 여럿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 지병이 있었던 경우라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지만 이번 친구의 죽음은 정말 갑작스러웠다.


작년 11월 하순에 집에서 스쿼터라는 운동을 1세트 겨우 마치고는  쓰러져 3개월 가량 깨어나지 못하다 하늘나라로 떠났다. 병명을 심근경색이라 했다. 나를 비롯해 고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멘붕에 빠졌다. 말도 안된다는 친구부터 그럴 리가 없다는 친구, 금세 깨어날 거라는 친구 등 대체로 너무 황당해 했다. 평소 워낙 건강했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친구는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등산 매니아라 할 정도로 자주 산을 오르내렸고, 매주 토요일에는 예순 나이에도 조기 축구회에서 체력을 뽐내면서 체력을 다졌고, 코로나로 인해 바깥에서 운동을 못하게 되자 집 안에서 역기, 철봉을 갖춰 놓고 매일 운동하였고 스쿼터, 프랭크 운동으로 몸에 군살이 생기지 못하게 했다. 프랭크 같은 운동의 지속 시간이 10분이 넘을 정도니 그 체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또, 축구를 하면서 축구이야기와 자신의 삶의 철학을 담은 저서 혼자 걷지 않으리』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영국 프로 스포츠를 좋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클럽이 게임을 하는 날에는 새벽에 딸, 아내와 함께 해당 클럽의 유니폼을 갈아 입고 함께 응원하기도 하는 엉뚱한 친구이기도 했다.



나에게 선물한 책도 축구와 관련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이란 책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벤섬 수용소에서 간수 몰래 셔츠 뭉치로 시작한 축구를 통해  하나가 되고 희망을 갖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 과정에서 평화를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만큼 운동을 좋아 하며 관리를 잘 했던 친구가 집에서  운동하다, 그것도 운동을 시작하다가  쓰러졌다니 믿기 힘들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모든 죽음이 다 각별하겠지만, 이 친구는 나에게 좀 더 각별한 친구다. 친구가 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친구를 좋아했다. 좋아했다기 보다는 여러가지 면에서 본받으려고 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랬고  삶의 태도, 그리고 생각의 깊이까지 닮으려 했던 것 같다. 모든 스포츠를 잘하는 것도 닮고 싶었지만 그건 선천적 한계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었다.


친구를 보내고 고등학교 시절의 앨범을 꺼내 들었다. 함께 찍은 사진이 대여섯 장 남아있다. 수학여행, 경주여행 사진, 교생 실습생 온 대학생과 더불어 찍은 사진도 있었다. 내 기억에 고교 시절에서 둘이서 따로 내 수준에서 일탈여행(?)을 한 것도 친구가 거의 유일한 것 같다.


이 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소위 '학생운동'을 했다. 지방에서 공부하는 나는 이 친구를 통해 학생운동 이론을 배웠다. 그때 공부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의로운 삶과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 많이 깨닫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한테 권했던 책중 한완상씨가 쓴 지식인과 지식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을 통해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지식기사가 될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마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세상에 대한 삶의 자세도 그때 길러졌던 것 같다.



이 친구는 졸업 후, 대구 사람으로 드물게 김대중씨의 평화민주당에 들어 가서 전라도에 공천을 받은 이수인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아마도 대구경북 지역에 기반을 갖고 있는 우리 친구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도전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후 늦게 고시 공부를 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변호사가 된 후에도 쉬운 길을 걷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폼나는 변호사는 아니었던 듯 하다. 인권변호사처럼 나서서 일한 것은 아니지만 의식 속에서 돈보다는 올바른 변호를 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친구들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생각이 다른 부분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드러내려 애쓰며 친구와의 어울림 그 자체에 의미를 두려 했다. 폭탄주도 먼저 만들어 돌리며 어울리려 했고, 노래방에 가서는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분위기를 주도 했다. 정작 노래 순서가 되면 아는 노래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거나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렇게 함께 하려 했던 친구다.


친구 영정의 십자가는 순전히 남은 가족들의 마음일뿐 내가 알기로 친구는 교회를 다닌 적이 없고 마음 속에도 하나님을 품을 적이 없다. 그렇지만 종교에도 열린 마음을 가졌던 친구다. 작년초 돌아가신 어머님이 노년에 교회를 통해 활력을 얻고 편해지자 친구도 적극적으로 어머님의 신앙생활을 도왔고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꾸며 그 모임시간을 친인척간의 가족간의 화목을 다지는 시간으로 함께했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훨씬 가까이 다가온 나의 죽음도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그 평가가 자부심이 되기도 하고 수치로 남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는 남은 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이고 남편이며 멋진 형제이고 친구로 남을 것 같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옳은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친구로 기억될 것이다.


나 역시 필부의 삶을 살더라도 친구의 삶처럼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삶이 되기를 소원하며 먼저 친구를 보낸 마음을 몇 자 글로 남기며 달래본다. 친구의 명복을 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