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를 잘하고 싶다면...
연말에 모임을 가면 은근한 스트레스 중 하나가 건배사다.
대부분 미리 부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때는 갑자기 시키는 때도 있어 애를 먹는다.
나는 건배사를 잘 하는 축에 속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주위에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더 큰 스트레스가 된다. 왜냐하면 기대수준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할때마다 '역시 다르다'는 평을 받으려니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모임에 가보면 건배사가 돌아오는 시간을 유독히 힘들어 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그냥 어정쩡 하게 주섬주섬 어색하게 일어나서는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위하여!'를 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면 참가한 사람도 그냥 머쓱하게 웃으면서 일치된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여기 저기서 '위하여'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와 느낌이 깨끗하지 않다. 이런 경우 위하여를 외친 분의 기분도 비슷할 것이다.
한편 미리 준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어플이나 인터넷을 보고 괜찮은 건배사를 기억해 두었다가 써 먹는 경우인데, 이것도 쉽지는 않다. 애써 기억해 와도 술을 마시다 보면 정작 필요할 때 생각나지 않거나, 기억이 나도 상황과 동떨어진 단어의 유희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임팩트를 주기는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으로 보면 녹화방송과 라이브와의 차이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밋밋하고 지루한 느낌이 든다. 가끔 기발한 단어 조합으로 좌중을 재밌게 만드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기발한 단어 건배사는 우체국 직원이었던 분이 외쳤던 우.체.국. 이었다.
우체국의 의미가 '우리의 체력은 국력이'라며 자신들의 업무와 딱 일치될 뿐 아니라 아주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단어를 이용한 건배사는 인터넷에 가보면 사방에 깔려 있다.
어떤 건배사가 분위기도 띄우고 의미도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건배사를 잘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현장에서 잡는 것이 좋다. 즉, 미리 준비하는 것 보다는 현장에서 찾아야 공감을 더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과 동떨어진 단어조합 보다야 그날 분위기나 의미를 이야기 하고 그 이야기 중에 핵심 단어를 이용해서 건배를 외치면 적어도 평균 이상을 하게 된다.
예를들어, 한 해를 겨우 버티고 버텨 힘든 시기를 보낸 조직이라면, "힘들 수록"이라고 외치면 "힘이되자"라고 답변하게 유도하여 전체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면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건배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참석자와 호흡하는 건배사가 좋다. 나의 일방적인 얘기 후에 건배를 외치는 것 보다는 주고받는 댓구방식의 건배사가 좋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가려면 생각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내가 댓구 방식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배사는, 술을 가리키며, "이게 뭐여?"라고 물으면, 청중들은 "술이여...", 그러면 건배하는 사람이 다시 받아, "아녀..", 그리고 청중들은 "그럼 뭐여?"라고 하고 마지막에 건배하는 사람이 "정이여~"하고 마시는 순이다. 이렇게 하면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의미도 있는 건배사가 된다.
이와 같이 긴 건배사를 할 때는 미리 몇 번 연습을 하는 게 좋다. 한 번 얘기하고 갑자기 하면 십중팔구 분위기를 망친다. 오히려 그냥 "건배!"라고 외치는 것만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긴 건배사를 외칠때는 청중을 집중시키고 살짝 연습을 한 뒤 외쳐야 그 효과를 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건배사를 잘하는 분들을 보면, 평소에도 유머와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생각이 고정되지 않고, 유연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위에 건배사를 잘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건배사를 잘 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평소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특히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유머를 즐기며 여유있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게 되면 건배사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건배사도 공감의 연장이다.
공감이 잘 되면 건배사도 잘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건배사를 잘하는 일이 개인의 성장과도 연결이 된다.
건배사를 잘하기 위해서 성장을 할 필요는 없지만, 성장을 하다보면 건배사도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건배사는 말의 유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