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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Oct 26. 2016

현재의 리더십은 우리의 수준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불했다고 하나 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불한 것이다...




레빈이라는 사람은 2000년대 초반, 리더십을 전제형, 민주형, 방임형 세가지로 나눴다.


이 세가지 리더십은 따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단어만 보면 알 수 있다. 전제형은 '원맨형'이다. 의사결정에 부하는 참여시키지 않고 혼자서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리더십이다. 반면 방임형을 그냥 내버려 두는 리더십이고 민주형은 전제형리더십과는 반대로 가급적 부하의 의견을 반영하고 부하의 적극성과 자주성을 중시하는 리더십이다.


이 세가지 리더십 중 어떤 리더십은 좋을까?


이 질문은 우문에 해당한다.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하니 왠지 민주형이 좋을 듯 싶기는 하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더 적합한 리더십이 있을 수 있지 더 나은 리더십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시점 어떤 조직에는 전제형 리더십이 또 어떤 시점 어떤 유형의 조직에서는 민주형이나 방임형이 더 적합할 수 있다는 거다.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민주화된 사회라 하더라도 모든 자녀에게 민주형 리더십이 맞지는 않다. 어떤 자녀는 부모가 전제형으로 대해야 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자녀는 방임형으로 그냥 지켜 보는게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국가를 리더하는 분들의 리더십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박정희정권시대에는 독재형 리더십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 분 때문에 아픈 과거를 겪은 분도 적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국민들은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있다. 뭔가 정돈되고 일사불란하게 정리해 주는 리더십이었다는 느낌에 대한 향수다.


반면에 민주화된 리더십은 혼란스럽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의사결정을 하려니 당연히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더디 결정될 수 밖에 없다. 몇 몇 민주화된 리더십에 지친 국민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다시 현재의 박대통령을 선택했다. 그리고 과거와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박정희 시대의 그 전제형 리더십에 익숙한 분의 통치 하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답답한 그 분의 소통에 힘들어 한다.


리더십이 뭔가? 리더십의 정의는 리더십의 정의를 내리는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고는 하지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라는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정의가 나온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쳐 의도한 방향대로 이끄는 것'이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이 각 리더십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





전제형의 리더십에서는 자신의 가진 힘과 정보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끔은 물리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때 힘과 정보는 그 자리가 주는 이기 때문에 그런 힘과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리더를 따를 수 밖에 없다. 전제형 리더십이 성공하려면 그 리더가 아주 똑똑하고 현명해야 하고 그 리더를 따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우둔해야 한다. 그래서 국민수준이 낮을때는 엘리트의 전제형 리더십이 성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제형 리더십을 사용하는 리더는 리더 노릇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독점한 정보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일방적으로 지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제형 리더십을 행사하는 리더가 수준이 미달한 경우에는 소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대화를 최소화 하면서 자신을 신비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을 물리적인 방법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반면, 민주형리더십이나 비전을 제시하고 따르게 하는 변혁적 리더십 그리고 머슴 리더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구성원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하고 도와주는 서번트(섬김)리더십과 같이 현대 나온 리더십들은 한결 같이 리더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당연히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이 될 수가 없다. 구성원들 하나 하나를 인정하고 그 구성원들로부터 의견을 끌어내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나온 민주형 리더십들은 모두 리더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정보도 공유되어 있고 힘도 분산되어 있어 스스로의 솔선수범과 실천이 아니고서는 부하를 따르게 할 수 없다. 따르는 사람이 보면 저절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도록 인격적으나 인간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도 성숙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오픈할 수 있고, 오픈된 상태에서 토론하면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지금의 국회선진화법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어쩌면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이러한 민주화된 리더십으로 가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하려는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없애려고 하다가 입장이 바뀌니 다시 고수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직 민주형 리더십으로 리더하고 리더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대의 리더십을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한테 적용해서는 효과가 있을리 없다.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판단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통하는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충분히 공유되고 서로의 의견이 존중되는 소통되는 사회에서 통하는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이런 리더십은 과거 독재시대에 지배를 받던 전제형 리더십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혼란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재 지도자의 리더십은 나를 포함한 우리 국민의 수준에 의해서 선택된 리더십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좀 더 민주시민이 될 것이며 그 결과로 좀 더 민주화된 리더십이 선택 될 것이다. 답답하지만 욕하지 말자. 우리의 50% 이상 선택한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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