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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Nov 30. 2015

오, 마이 친정 아버지

참 힘든 사람

어렸을 때 나는 평범한 딸들처럼 아버지를 좋아했다. 열서너살이 되었을 무렵까지 그랬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떠진 것처럼 그분의 갖가지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분의 가장 큰 단점은 가족을 적절하게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항상 '효도'를 최고의 가치로 꼽으며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대단히 서비스가 좋으셨지만, 결정적으로 참 착하고 소녀 같은 아내(내게 세상 최고의 엄마)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 아내가 낳은 남매에게도 지나치게 권위를 내세우셔서 우리 가족은 마치 아버지가 말뚝을 박으려다 말았다는 군대 같았다. 아버지는 가족이 꼭 상하로 이어지는 수직체계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셨던 것이다. (학군단 출신인 아버지는 대위로 전역하셨다. 간부! 이것도 비극의 씨앗이었던 것이, 아버지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간부'와 '비간부'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의 마음의 거리는 멀어졌다. 그렇지만 그분이 '감히' 멀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더 수백 리씩 달아났다. 빨리 독립하고 자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두 분의 결혼생활을 보면서 결혼에도 끝없이 시니컬했지만, 남자(아니, 연애인가..)가 너무 좋았던 나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사귄 남편과 결국 결혼했다. 그래도 결혼을 하면서 나는 드디어 집에서 나올 수 있는 자격을 취득했고, 나는 친정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수도권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국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내 도리를 다하는 한에서 최대한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부분의 딸들이 그렇게 가고 싶다는 친정은 내게 별로 편하지 않은 곳이어서 엄마는 항상 서운해하고, 나는 내 집을 제일로 좋아하며 살고 있다.


어쨌든 주사도 없었고, 도박도 없었고, 물리적인 폭력이 없었고, 여자도 없었고 40년간 한 직장에 다니며 가족을 부양하고 노년에도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않는 그분을 세간 사람들은 흠 잡을 데 없는 아버지상으로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 그분을 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는 '부모'란 자식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기를 쓰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그분과 통화를 할 때나 만나서 대할 때 우리 회사 오너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와 태도를 보여서 마음이 약한 우리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뻣뻣한 딸과 독선적인 남편은 똑같은 성격에다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극적인 화해 따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엄마는 알면서도 포기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번 출국을 앞두고 엄마는 "아버지가 같이 남원에 가자고 하시는데..." 하며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남원은 아버지의 고향이고, 조부모님이 사시던 집이다. 90년대 초에 새로 지은 후에 한 3년 전 리모델링을 한 양옥인데, 리모델링을 한 후 이 집을 명절 때 남원까지 갈 일 없는 딸 부부에게 너무나 자랑하고 싶으신 나머지 이번 출국을 핑계로 일을 만드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통화를 하며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 곤란하다고 항변해봤지만 아버지는 "쓸데없는 소리 마라!"로 묵살하고 날짜를 정하셨다. 그 집은 아버지에게는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의 남매 중 가운데로 태어나, 전라도 출신이라는 출생적 한계 안에서 발버둥쳐서 이룩한 자신의 '자수성가'를 상징하는 집인 것이다. 그 집에서 그분은 항상 가장 큰 목소리를 내며, 지휘하며, 행복을 느낀다. 아직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동창들 사이에서 자신은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집은 아버지처럼 그렇게 사랑스러운 장소가 못 된다. 어릴 때부터 명절과 아버지 휴가 때마다 가서 낯익은 곳이긴 한데, 아버지와 멀어지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부터 나는 그곳이 별로였다. 시골이기 때문에 서울 태생인 내게 불편한 건 물론이고, 조부모님에게서는 따뜻한 애정이라는 것을 별로 느껴보지 못했고, 여자들은 끝없이 일을 하고 남자들은 당연히 얻어먹는 분위기가 더럽게 싫었다. 소녀 때부터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물을 틀고 그릇을 씻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할머니도 싫었고, 고기 반찬이 적을 땐 남자들 상에만 올라가는 것도 짜증났다. 내가 시골집에서 행복을 느낀 때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촌동생과 소꿉놀이를 하던 때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새로 단장했다는 그 집에도 일 그램의 관심이 없을 수밖에. 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그분이 마음 먹으면 거절 같은 건 없다.


출발 전에 개를 맡기기 위해 오빠네 집에 들렀다가 고속터미널에서 아들과 부모님과 집합하기로 했는데,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돼서 집에서 한참 전에 출발했어야 할 아들의 전화가 왔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참 장한 소식... 그 지갑에 교통카드와 현금이 모두 있으시다는 소식... 예매했다는 고속버스 시간은 딱 한 시간 남았고, 나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버럭하는 그분을 생각하며 진땀이 났다. 택시를 타라고 했더니 택시를 어디서 타냐며 어리버리하고, 결국 전철에 무임승차를 한 후에 개찰할 때 정산을 하기로 했다. 속이 까맣게 탔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데 아버지가 화까지 낸다고 생각하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애가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서 덜미를 잡아채고 미친 듯이 달려서 늦지 않게 승차장 앞으로 왔더니 이거 웬걸, 부모님은 아직 오시지도 않았다. 어디서 따로 움직이셨는지 엄마가 10분 전에 나타나셨고, 아버지는 출발 5분 전에 아주 여유롭게 나타나셨다. 아들을 아버지와 앉히고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 차는 오븐 같았다.


저녁 6시 30분쯤 목적지인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아버지는 택시를 부르는 대신 자신과 마찬가지인 칠십대 노인을 기사로 불러냈다.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그 노인분은 집에 딸이 와서 고기를 구우려는데 나왔단다. 부르는 노인이나 나오는 노인이나.. ㅠ_ㅠ 다섯이서 육회비빔밥을 파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운전할 노인에게 소주를 따라주는 아버지 때문에 나는 갈비탕 맛도 잘 모를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별장'까지 다시 그 차를 얻어타고 달려서 집 안으로 들어와서 새 단장한 집을 둘러보고는 잽싸게 이 집에서 묵을 때면 항상 여자들 숙소로 배정되던 작은방으로 달려가서 자리를 잡았다. 불을 때지 않아서 냉랭했지만 드디어 해방된 느낌이라 얼마나 좋던지. 그 방에는 스물두세 살 때쯤, 명절 차례가 끝나고 나서 성묘에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뒈지게 혼났던 참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미혼 시절 그 집에 끌려오면 나는 항상 그 방에 짱박혀 있고 싶었다. 참 애타게 분리되고 싶었다.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마찬가지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인지 그 방이 편했다. 수업이 끝나고 내려온 남편이 한 시간 후쯤 도착하자, 아버지는 식당에서 남겨온 소주를 그 사람에게 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코빼기를 비치지 않고 그 방에 숨어 있었다. 남편은 한참 후에 나타나서 난로를 켜고 1.5인용밖에 되지 않는 전기요 위에 나랑 몸을 붙여 누웠다. 나름 일주일 만에 만난 반가운 주말부부인 우리는 밀린 소식을 서로 나눈 후에 전기요에서 삐져나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잤는데, 새벽에 우리 부부가 낳은 아들이 불쑥 그 방으로 들어와서 우리 셋은 추위에 맞서 똘똘 뭉쳤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그 집으로 자러 들어오면서 아무것도 사오지 않은 것은 깜빡 잊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절대로 손 까딱 안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와라 차려라 다 먹어라(남길 수 없음) 할 그분 때문이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엔 지나치게 일찍 깨우지 않으셨다. 새벽부터 일어나 사람들을 들들 볶는 평소 모습하고는 조금 달랐다. 그리고는 온 식구를 불러모아 창고에 있는 금고(진짜 뜬금없는 물건) 앞에 세우시더니, 두 번 실패한 후에 금고 문을 열어 우리 가족에게 줄 달러를 꺼내서 주셨다. 굳이, 금고에 넣었다가, 굳이, 모두를 불러내서 세운 다음에 주시는 것이 그분 스타일인 것이다.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만 있어서 단촐해서 못했지, 오빠네 식구 정도만 더 있었어도 식순에 따라 박수를 치고 악수를 하며 사진을 박고도 남았을 텐데.

금일봉 전달 후 광한루 옆에 있는 식당으로 백반을 먹으러 차에 타고 나갔다. 백반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계란후라이와 구운 조기가 있으니 밥상에 평화가 있도다, 느낀 바로 다음 순간 아버지는 남편의 클래스 메이트들을 "후진국에서 온 애들"이라고 표현하셔서 내 아들을 어떤 식으로든 '차별'과 먼 인간으로 기르고 싶은 내 마음에 울화통을 선사하셨고, 식사 후에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광한루에 아주 자연스럽게 무료 입장을 하려고 하셔서 예민한 중년 딸을 이마짚하게 만드셨다. 그 후 목욕탕을 좋아하는 남편을 시내의 목욕탕 앞에 내려주고 조부모님 산소에 들렀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있는 시간 내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차가운 방에 자가유폐되어 우리집보다 신형인 텔레비전을 봤다. 와이파이도 데이터도 없는 상태라 텔레비전밖에는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삼대천왕의 다른 회를 다 합쳐 세 회차 정도 봤다. 부대찌개, 돼지불고기, 부침개. 백종원 씨의 방송과 함께 생각보다 아침과 점심 사이의 시간은 빨리 흘렀다. 남편은 목욕탕에 갔다 왔고 엄마는 시내에 있는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다. 미리 끊어놓은 버스표 시간에 늦지 않을 만큼 계산해서 시내의 큰 식당으로 가서 육회와 등심 구이와 육회비빔밥(아들이 또 먹고 싶어했음)을 주문해서 기름진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는 또 우연히 지역의 삼선 국회의원이었던 구십 다 된 노인을 만났다. 아버지가 항상 말하는 '간부' 중에서도 '간부'를 만난 셈이다. 칠십 노인은 구십 노인을 수족같이 돌보며 살피며 나서서 불편을 해소하는 데에 앞장서셨다. 강한 자에게 제대로 약하고, 약한 자에게 제대로 강한 모습을 자식 앞에서 평소 많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참 씁쓸하더라.


버스는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더 걸려 도착했고, 나는 더운 버스 안에서 한 시간 정도 더 쪄졌다. 뒷자리에는 해소를 앓고 있는 노인이 의자를 잡고 당기면서 몇 시간 동안 엄청난 소리를 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내게 아버지는 '해단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고,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넷이서 터미널 안에서 칼국수와 만두를 먹고 헤어졌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먹는 것이다. 나도 참 먹는 걸 좋아하면서도 아버지와 먹는 게 힘든 이유는, 그분은 음식을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 식욕이 없어서 남긴 만두는 그분이 뭐라 하기 전에 포장해서 챙겼다.


이 1박 2일의 일정 동안 아버지는 내게 한 번도 식대를 내게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딸에게 바라는 것이 금전 따위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는 금전으로 하는 도리보다도, '사랑'이 더욱 어려운 법이다. 나는 아주 희미한 죄책감과 강렬한 해방감으로 '이번에 납세를 했으니 한동안은 프리하겠지'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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